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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잠을 저축하세요! - 수면 저축 은행 -

요즘 현대인은 시간에 쫓기며 살아간다.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계획을 세우면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현실이고, 몇 해 전 이와 같은 틈새시장을 노린 한 중소기업이 “시간 관리사”라는 것을 만들어서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고객들의 직업과 성별, 나이 등에 맞게 시간 계획을 해주고 스케줄을 미리 알려주는 일종의 비서와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시간의 낭비를 효율적으로 막지는 못했다. 자신의 일을 남이 미리 계획하는 것 때문에 사생활 침해 논란이 일었고 자기 자신만큼 자신의 일을 효율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다는 한계점을 극복하지 못해서였다. 이런 고민은 시간의 관리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그것은 바로 하루의 3분의 1정도를 무의미하게 소비하는 듯해 보이는 수면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수면 저축 은행』이다.


2015년, 문명의 새로운 혁명이 일어났다. 매스컴이 떠들어대고 많은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던 이 사건은 바로 『수면 저축 은행』의 탄생이었다. 『수면 저축 은행』은 보통의 은행과 다름이 없는 은행 업무를 하였다. 예금을 받고, 대출을 하고, 이자를 주고, 수수료를 받는 등의 업무를 하는 일반 은행과 마찬가지의 업무를 하는 곳이 바로 『수면 저축 은행』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돈을 취급하는 일반 은행과 달리 새로 나온 이 은행은 바로 수면, 즉 인간의 잠을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수면 저축 은행』의 탄생은 한 사람의 작은 욕심에서 시작되었다. 이 기발한 은행을 연 은행장은 한국의 30대 중반의 한 남자였다. 그가 밝힌 『수면 저축 은행』의 탄생 배경은 엉뚱하기까지 했다. 은행장의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그때가 바로 2004년이었습니다. 한국의 모든 곳에서 《아침형 인간》 열풍이 불었습니다. 일본인 사이쇼 히로시가 쓴 《인생을 두 배로 사는 아침형 인간》이라는 책이 인기를 끌면서 시작되었던 이 열풍은 때마침 불었던 ‘웰빙(Well-Being)’ 바람과 맞물려 2004년의 최고 히트 상품이 되기도 했죠. 그때 가난한 작가였던 저는 이와 같은 열풍을 보고 한 가지 생각을 했죠. ‘사이쇼 히로시는 그 책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을까? 나는 어떻게 하면 저런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까?’하고요. 그래서 결심을 했습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일로 대박을 터뜨리기로요. 그래서 ‘일찍 일어나야’ 성공하는 아침형 인간을 뛰어 넘을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는 새로운 성공 상을 만들어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썼던 글이 바로 《수면 저축 은행》입니다. 이 글은 발표 당시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습니다. 과학적 근거를 전혀 갖추지 못한 한 작가의 엉뚱한 발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때 저에게 손을 내밀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한 벤처 투자가라고 소개한 이 사람은 저와 함께 『수면 저축 은행』 프로젝트를 해나가자고 했죠. 그리고 지난 10여 년간의 연구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은행입니다.”


은행장의 인터뷰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의 엉뚱한 발상에서 시작된 프로젝트가 새로운 문명의 탄생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획기적인 일이 될 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수면 저축 은행』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인간은 하루의 3분의 1정도를 잠을 자면서 보낸다. 잠은 인간의 지친 몸의 원기를 회복시키고 정신을 맑게 하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24시간인 하루 중 8시간을 잠을 잔다고 계산하면 365일인 1년 중 120여일을 잠을 자면서 보낸다는 것이다. 이를 인간의 평균 수명인 90년에 대입해보면 인간은 자신의 일생 중 30년 정도를 잠을 자는 것이다. 시험을 앞두고 밤샘 공부를 하며 잠을 쫓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잠이 들어버린 일, 늦잠 때문에 학교와 직장에 늦어버린 일이 비일비재한 사람들은 잠에도 새로운 처방약이 있었으면 했다.


『수면 저축 은행』의 관리 방식은 간단했다. 잠을 자도 상관없는 시기에 잠을 자서 저축을 해놓고 잠을 자면 안 되는 중요한 시기에 저축해놓은 잠을 찾아다가 쓰는 것이다. 물론 저축해놓는 기간에 따라서 일종의 이자가 지급된다. 그리고 잠을 찾을 때는 정해진 수수료로 일정량의 잠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통 수면 저축〉이다. 그리고 일정량의 잠을 일정한 기간 동안 보관해놓는 〈정기 수면 예금〉, 일정량의 잠이나 일정 기간을 목표로 정해서 많은 양의 잠을 이자로 받는 〈정기 수면 적금〉등이 『수면 저축 은행』이 취급하는 수면 예금의 종류였다. 그리고 『수면 저축 은행』은 미리 잠을 자놓지 못한 고객을 위해서 잠을 대출해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시험이 당장 내일로 닥친 사람이 24시간을 맨 정신으로 이용하고 싶으면 24시간짜리 잠을 대출 받는 것이다. 그리고 대출 받은 수면을 다 이용한 후 정해진 기간 내에 대출 받은 수면에 일종의 수수료로 정해진 양의 잠을 더한 수면을 갚아나가는 것이다. 하루를 몰아서 잠을 자서 갚을 수도 있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씩 몇 시간씩의 수면을 더 취해 갚아나가는 방법 등도 있다. 하지만 『수면 저축 은행』은 과다한 수면 대출을 막기 위해 최대 수면 대출의 양과 한 사람이 평생 대출할 수 있는 수면의 양을 정해놓았다. 수면을 대출 받아 방탕한 생활을 하거나 이를 악용하는 것을 방지하고, 정말 중요한 순간에 잠을 적절히 사용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이런 수면의 저축과 대출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여기에는 약간의 제한 조건이 가해진다. 그것은 바로 무미건조할 정도로 깨끗한 잠이다. 『수면 저축 은행』이 업무를 시작함과 동시에 선보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헬멧과 같이 생긴 물건이었다. 이 물건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인간의 수면에 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인간의 수면은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있다. 성인의 경우에 90분 정도의 수면주기 동안 여러 단계의 수면기를 거치면서 정상 수면 중 수면주기를 4내지 6회 정도를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수면은 크게 논렘(nonREM) 수면과 렘(REM) 수면으로 나뉜다. 렘(REM) 수면은 Rapid Eye Movement를 의미하는 말로 급속안구운동을 나타내며 자율신경계가 항진되어 심박동, 혈압, 호흡의 변동이 심해지고 꿈을 꾸게 된다. 이 상태의 수면은 뇌에는 얕은 잠이지만 몸에는 가장 깊은 잠이다. 그리고 논렘(nonREM) 수면은 꿈을 꾸지 않는 수면이다. 꿈을 꾸더라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논렘(nonREM) 수면이다.


『수면 저축 은행』은 인간의 수면 중 꿈을 꾸지 않는 논렘(nonREM)수면만을 취급한다. 그 이유는 고객과 은행이 수면을 거래하는 도중에 생길지도 모를 착오나 생기지 않아야할 일 -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수면을 주는 일이나 수면을 대출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꿈을 꾸는 일 등 - 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꿈이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수면만을 취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앞에서 언급된 헬멧이 이용된다. 인간이 잠을 잘 때 뇌파가 발생한다. 그리고 잠을 자는 깊이에 따라서 다른 종류의 뇌파가 발생한다. 잠을 청하는 동안에는 점점 졸리면서 뇌파는 느려져 알파파가 나타나고, 깨어있을 때 주로 나타나는 베타파와 알파파가 사라지고 보다 촘촘한 세타파가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잠이 깊어지면서 비교적 느리고 진폭이 큰 델타파가 나타난다. 이때 깊은 잠을 자는 것이다. 이 헬멧은 고객이 설정한 수면 저축이나 수면 대출의 양과 기간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뇌파를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뇌파의 영향으로 인간의 잠의 양과 기간이 조절되는 원리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조건과 장비를 갖추고 시작한 『수면 저축 은행』은 시작과 동시에 많은 고객을 확보할 수 있었고 현재도 새로운 수면 저축 상품을 개발 중에 있다.


당신의 인생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잠!


당신은 어떻게 보낼 것인가?


지금 바로 가까운 『수면 저축 은행』으로 오라.


당신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



* 『수면 저축 은행』의 수면 예금 종류


1. 보통 수면 저축: 수면을 수시로 입․출할 수 있는 예금. 수면 이율이 낮음.


2. 정기 수면 예금: 일정 기간 동안 수면을 저축해 놓을 수 있는 예금. 3개월, 6개월, 1년 단위로 수면의 저축이 가능. 수면 이율이 높음.


3. 정기 수면 적금: 목표로 하는 수면의 양이나 목표 기간에 따라 수면 저축 가능. 한 달에 한 번씩 정해진 날짜에 수면을 저축하는 방법. 보통의 수면 이율.


4. 교육 저축 예금: 수험생들을 위한 예금. 유년기에 수면을 저축하여 수험 기간에 꺼내 쓰는 예금. 수면 이율은 낮으나 성적 향상에 따른 장학 수면 지급함.



* 『수면 저축 은행』의 수면 대출은 가까운 『수면 저축 은행』 지점에 문의하세요.


* 문의


홈페이지: http://www.sleepbank.com


대표 전화: 02) GO-SLEEP



《위의 내용은 (주)『수면 저축 은행』의 홍보 문구입니다.》

- 2004년 10월 2일 조약돌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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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누크(Chinook)


새로운 놀이 기구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우방 랜드로 달려왔다. 얼마 전 9시 뉴스를 통해 새로 나온 놀이 기구가 그 전의 놀이 기구의 가격을 뛰어 넘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기대가 컸다. 인터넷을 통해 어렵게 구입한 탑승권이 1만원인 것을 볼 때 새로 나온 놀이 기구는 대단한 스릴을 선보일 것 같았다.


[2010년 1월 21일 오후 12시 40분!]


내 탑승권에 인쇄된 놀이 기구의 탑승 시간이었다.


내가 가진 새 놀이 기구의 탑승권은 한반도를 통틀어 총 15명에게만 한정 판매된 새 놀이 기구의 첫 탑승권이었다. 나는 30명 중 1명에 드는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다. 물론 내 여자 친구도 나와 같이 탑승하게 되었다.


나와 그녀는 설렘을 안고 오전 일찍 우방 랜드를 찾았다. 커다란 장막에 가려진 놀이 기구가 보였다. 나와 그녀는 바이킹 같은 고전 놀이 기구를 타며 시간을 보냈고, 어느새 12시가 가까워졌다. 솜사탕을 먹던 그녀가 나에게 던진 한 마디는 이러했다.


"도영씨, 이거 너무 기대되는걸, 도대체 어떤 놀이 기구이기에 언론에서도 공개할 수 없었을까?"


그랬다. 9시 뉴스에서는 새 놀이 기구의 영상을 공개하지 않았다. 아니, 공개하지 못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뉴스를 통해서 새로운 놀이 기구가 개발되었다는 소식과, 그것이 엄청난 가격의 기계라는 것, 그리고 그 어떤 놀이 기구에서도 맛보지 못한 즐거움과 스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우방 랜드 사의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덧붙여 초회 탑승권은 1인 2매로 총 30매 한정으로 발매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초회 탑승 때 그 모습을 공개한다는 것이었다.


새 놀이 기구의 이름은 시누크(Chinook)였다. 나는 이 시누크의 초회 탑승에 욕심이 생겼다. 새로운 놀이 기구의 첫 탑승은 놀이 기구를 좋아하는 나에게 큰 기쁨이 될 것이고, 잘하면 언론에 얼굴이 공개되는 행운을 얻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으로 실시된 초회 한정 탑승권의 구입을 위해 컴퓨터 앞에 대기하였다.


'오, 사, 삼, 이, 일.'


탑승권 구매 시각에 1초의 오차도 없이 구입 버튼을 클릭 하였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시누크(Chinook)의 초회 한정 탑승권을 구입하셨습니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스릴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라는 문구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이렇게 하여 나는 시누크 첫 탑승의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다.



[2010년 1월 21일 오후 12시 정각!]


우방 랜드의 사장이 나와 장막으로 가려진 시누크의 모습을 공개하였다. 사진 기자들의 플래시는 연신 터졌고,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시누크(Chinook)!


그것은 수송용 헬기였다. 전쟁터를 수없이 오고 갔던 그 헬기였다. 두 개의 프로펠러가 반대방향으로 회전하며 죽음의 공간을 오갔던 수송 헬기 시누크가 놀이 기구 시누크였던 것이다.


나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평화의 시대가 온 뒤 전쟁의 상처는 놀이 기구의 환희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 헬기가 놀이 공원에서 새로운 비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초회 비행의 탑승객이 된 것이다.


마지막 안전 점검과 기자들의 인터뷰는 30분간 진행되었다. 그리고 12시 30분, 나와 나의 여자 친구를 비롯한 30명의 탑승객이 시누크에 올랐다. 좌측과 우측에 각각 5개씩의 창이 나 있었고, 좌측과 우측에 일렬로 늘어져 있었다. 각각의 좌석에 15명씩 앉았다. 그리고 안전벨트를 매었다.


나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들떠 있었다. 시누크에 타고 있는 모두가 그래 보였다. 시누크의 밖에 있는 구경꾼들의 얼굴은 부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이윽고 시누크의 프로펠러가 돌기 시작했다. 처음엔 천천히 돌더니 이내 굉음과 함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돌았다. 그리고 내 몸이 약간 흔들렸다. 시누크가 날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아무 느낌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창문을 통해 점점 작아지는 우방 랜드를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뿐만이 아니라 장난감 마을 같은 시내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시누크를 둘러쌌던 카메라의 플래시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날고 있었다.


어느 정도 안정감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 시누크가 좌우로 흔들렸다. 가슴이 점점 더 빨리 뛰자 시누크도 내 마음을 아는지 마치 파도 위의 배처럼 위아래로 조금씩 흔들리며 날았다. 내 가슴은 환희로 가득 차 올랐다. 대단한 놀이 기구라고 생각하며 이 좋은 기회를 세상의 누구보다 빨리 가지게 된 것을 신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시누크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아래로 점점 빨리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비상!]


이라는 적색 등이 켜지고 사이렌 소리 같은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 여자 친구의 손을 꼭 잡고 걱정 말라고 안심 시킨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아수라장이 된 시누크 안에서 나는 낙하산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여기는 낙하산이 없다는 것을. 불시착을 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나는 안전벨트를 풀려고 했다. 하지만 벨트는 풀리지 않았다. 탑승객중 일부는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렸다.


프로펠러의 굉음, 사이렌 소리, 탑승객의 비명을 가득 채운 채 시누크는 땅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사히 착륙하였습니다.' 라는 안내방송과 함께 시누크는 땅에 내려앉았다. 아주 사뿐히. 근처 비행장 같아 보였다. 안전벨트가 풀리고 내가 여자 친구의 눈물을 닦아 주고 있을 때 마지막 안내방송이 나왔다.


'그동안 느껴 보지 못한 짜릿함을 느끼셨습니까? 시누크에 탑승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0명의 탑승객을 태우고 우방 랜드로 향할 버스 위로 두 개의 프로펠러가 달린 기계가 굉음과 함께 다시 날아올랐다.

- 2004년 1월 26일 조약돌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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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와의 인터뷰


운동복을 입고 문밖으로 나섰다. 새벽 공기는 쌀쌀했다. 나는 동네를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꿈나라의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대부분의 집은 불이 꺼진 상태였다.


“한 바퀴만 더 돌고 들어가야지.”


새해를 맞이하여 운동을 시작했지만, 이렇게 꾸준히 운동을 하게 될지는 몰랐다. 작심삼일이란 말은 나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왠지 모를 만족감을 느끼며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 맑은 공기가 폐 속을 정화하는 듯 상쾌했다.


다시 천천히 뛰기 시작하던 나는 멀리 땅바닥에서 빛나는 작은 불꽃을 발견했다.


“담배꽁초 아냐?”


불이 붙은 듯한 기다란 담배 한 개비가 바닥에서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다 담배에 붙은 불꽃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이대로 두고 가면 담배 연기가 맑은 공기를 더럽힐 것이다. 어쩌면 어딘가에 옮겨 붙어서 불이 날지도 모른다. 나는 담배꽁초를 밟기 위해 흰색 운동화를 신은 오른발을 높이 들었다.


“자, 잠깐만. 밟지 마.”


어디선가 들린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는 정체 모를 힘이 숨어 있었을까? 내 오른발은 담배꽁초에서 빗나가 그 옆의 맨땅을 내딛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새벽의 정적만이 거리에 감돌고 있을 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내가 들은 목소리를 뭐람? 아직 잠이 덜 깬 것일까? 이제 남은 반 바퀴만 더 돌고 돌아가서 한 숨 자야지. 나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봐, 여기라고. 그냥 가지마.”


등 뒤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곳을 발견한 나는 크게 놀랐다.


“다, 담배가 말을 한다.”


그랬다. 나에게 말을 건넨 것은 바로 타들어가고 있는 담배꽁초였다. 그렇게 그와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달밤에 체조를 하다가 도깨비불에 홀린 것처럼.


“뭘 그렇게 유심히 봐? 말하는 담배 처음 보는가? 보아하니 담배를 피우지 않나보군.”


담배에게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 피우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는 것일까? 내가 비흡연자라는 것을 어떻게 안 거지?


“음음, 그렇게 빤히 쳐다보니 내 소개를 하지. 나는 막 불이 붙었다가 버려진 담배라네. 사람들은 1미리 담배라 부르더군. 아무튼 반갑네.”


“이거 꿈이죠? 담배가 말을 하다니. 말도 안돼.”


“허허, 내가 방금 말하지 않았던가? 말하는 담배 처음 보냐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 우리 담배들은 훌륭한 대화와 상담의 상대라는 걸 말이지. 일단 날 좀 들어 올려주게. 날씨도 쌀쌀한데, 바닥에 누워 있으려니 몸이 떨리는구만.”


내가 바닥에 놓인 그를 곧바로 들어올렸다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일이 진행되는 것이 정말 눈 깜빡할 사이였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을지라도.


“고맙군. 그렇게 손에 좀 들고 있어주게. 이제 곧 죽을 사람의 마지막 부탁이라 생각하고 말이야.”


그렇게 담배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이 몸을 불태우면서 하는 일이 뭔지 아는가?”


“그야, 뭐. 하얀 연기가 되어서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거죠. 흰색 연기는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그리고 담뱃재는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거리를 더럽히고. 폐암도 일으키고.”


“그만, 그만.”


내 손에 들린 담배의 불꽃이 유난히 붉어지는 것 같더니 그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너무 정곡을 찌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거야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조금만 주의를 하면 바뀔 일이고. 본질을 보라고. 우리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한다네. 뜨거운 열기를 참으며 하얀 연기로 다시 태어나는 거지. 연기에 다양한 이야기를 싣고 하늘로 올라간다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무슨 이야기를 모은다는 거예요?”


“담배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과 대화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나? 아직도 이 상황이 꿈이라 생각하는 건가?”


“아, 아니에요.”


“그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계속 말을 하겠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길면 2~3분이야. 짧으면 30초도 주어지지 않지. 불이 붙어서 꺼지기 전에 이야기를 수집해야 해. 혼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의 한숨 섞인 푸념부터, 여럿이서 모여서 피우며 나누는 음담패설까지. 우린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모으지. 그리고 하늘에 올라가면 모아온 이야기를 풀어놓는 거지. 다양한 화젯거리가 있다네. 아픈 가족을 걱정하는 한숨 소리, 직장 상사에게 혼난 후의 넋두리,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후의 아픔,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는 답답함. 최근에는 여성 애연가들의 이야기도 인기를 얻고 있지. 물론 이야기를 들으며 단순히 노닥거리는 것은 아니야. 얼마나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느냐에 따라서 담배로 환생하는 순번이 빨라지니깐 말이지. 요즘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줄어서 담배로 환생하는 것도 경쟁률이 치열해졌거든.”


“환생이라고요? 담배가 담배로 다시 환생해요?”


나는 뭔가 우스운 생각이 들어 그에게 되물었다.


“그래, 다시 태어나는 거지. 얼마 전에는 자살 직전에 피운 마지막 담배가 그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는 일을 했었지. 그 경험담을 들려준 담배는 공로를 인정받았고, 포상으로 그동안 간절히 원했던 시가(Cigar)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 앞으로 1년간 말이야.” 


“그래요? 그럼 당신은 1미리 담배로 태어나기 전에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요?”


“하하, 그 이야기가 듣고 싶은 것이군. 그때 내가 했던 이야기는 재미없었다는 반응이었어. 만년 작가 지망생이 구상하던 소설 이야기였지. 그 친구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생각을 할 때 난 그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들려주면 최소한 순위권에는 들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웬걸? 막상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더니 듣고 있던 녀석들이 꾸벅꾸벅 졸기까지 하더라고. 그 친구가 작가 지망생으로만 남아 있는 이유를 그때서야 알게 되었지. 담배들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어찌 눈이 높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말이지.”


웃고 떠드는 사이에 나는 담배와 나의 대화가 곧 끝이 날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손에 들린 담배가 거의 다 타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도 하늘로 돌아갈 시간이 된 거 같군.”


“그런데 날 만나지 않았으면, 담배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못했겠죠? 한두 모금 빨다가 버린 장초였으니깐 말이죠.”


“이봐, 뭘 모르는군. 이렇게 장초로 남겨지는 것도 나름 매력이 있단 말이지. 맑은 공기를 빨아들이며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고, 그렇게 인생을 마감할 수 있으니 말이지. 사실 이번에 난 은퇴를 할 생각이었거든.”


“은퇴라뇨?”


“담배로 다시 태어나는 걸 그만둘 생각이었지. 이번에 돌아가면 특별히 들려줄 이야기도 없으니 그야말로 잘 되었다고 생각하던 중이었거든. 그동안 너무 오랜 시간 담배로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 젊은 친구들을 위해 양보해야할 때도 이미 지난 것 같고 말이야.”


내 손에 들린 그가 마지막 입김을 내뿜으려 하고 있었다. 나도 이제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작별 인사를 해야겠군. 운이 좋으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이제 은퇴한다고 말했잖아요?”


“자네와 나눈 대화를 들려주면 은퇴시키지 않을 것 같은데? 나이가 들었다고 은퇴하라는 젊은 친구들을 설득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얼마나 오래 사셨는데요?”


“자네 콜럼버스라고 들어봤는가? 알고 보니 그 사람 꽤 유명한 사람이더군. 나에게 처음으로 이야기를 들려줬던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네. 아무튼 난 이만 가봐야겠네. 오늘 대화는 참으로 즐거웠네.”


“잘 가세요. 이 담배꽁초는 양지바른 쓰레기통에 고이 묻어드릴게요.”


“대화를 하면서 느낀 건데 자네는 예의도 바른데다가 남다른 유머 감각도 있는 것 같구만. 고맙네. 자네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담배를 피울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 기억하게. 담배와 대화를 나눈 사람은 많겠지만, 내가 아는 한 이 세상에서 담배랑 인터뷰를 한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라네.”


그렇게 그와의 대화는 끝이 났다. 하늘로 올라가는 하얀 담배 연기를 바라본 후에 나는 담배꽁초를 든 채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새벽 공기를 가르는 내 입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 2009년 7월 12일 조약돌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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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담배와의 인터뷰  (1) 2009/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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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14 10:1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 입니다

ontown 바로가기 Be the Reds(빨갱이가 되자)


오후 10시 정각을 알리는 시계 화면이 끝남과 동시에 <파.고.다.>의 방송 시작을 알리는 화면과 함께 로고송이 송출된다. 화면은 방송 스튜디오의 모습으로 바뀐다.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사회의 잘 드러나지 않는 현상을 ‘파헤쳐 보고, 고민해 보고, 다시 보는’ <파.고.다.>의 최성훈입니다. 지난 주 방송에서 다루었던 인터넷의 악성 댓글에 대한 시청자 여러분의 뜨거운 관심이 한 국회의원의 “악성 댓글 처벌법” 발의라는 성과를 이루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저희 방송에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제 옆 자리에 <파.고.다.>의 김익선 프로듀서가 나와 있습니다. 김 피디, 오늘 방송에서 다룰 내용을 소개해주시죠?


- 네, 안녕하십니까? 김익선입니다. 오늘 <파.고.다.>에서 다루어 볼 문제는 그동안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 잘 꺼내려하지 않았던 색깔 논쟁입니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는 빨간색을 꺼려하는 풍습이 만연하였습니다. 반공 의식이 철저히 강조되어 온 그 당시에 방송 프로그램이 공산주의의 상징이라고 여겨진 빨간색에 대해 다룬다는 것은 아마도 목숨을 내놓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풍토는 점점 바뀌어왔습니다.


-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로 빨간색을 선호하는 국민들이 늘어났죠?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거리 응원 장면이 자료 화면으로 나온다. 화면에서는 붉은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응원을 하고 있다.


- 네, 그렇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성공 개최와 함께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선전으로 인해 빨간색을 이용한 마케팅, 이른바 레드 마케팅이 성공을 하였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로 모든 국민이 빨간색 티셔츠 한 장 이상은 가지게 되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 'Be the Reds'라는 영어 문구가 새겨진 이 빨간 티셔츠를 말씀하시는 거죠?


- 네, 맞습니다.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공식 서포터즈인 붉은 악마에서 제작한 이 티셔츠는 불티나게 팔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런 레드 마케팅은 2006년 독일 월드컵 기간에도 또 한 번 성행하게 됩니다.


-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다룰 주제는 월드컵 거리 응원입니까?


- 아닙니다. 하지만 월드컵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즐겨 입었던 이 티셔츠와는 관계가 있습니다.


- 'Be the Reds' 티셔츠 말씀이시군요?


- 네, 그렇습니다. ‘Be the Reds(비 더 레즈)'라는 영어 문구를 우스개 소리로 ’빨갱이가 되자‘라 해석하는 말을 들어보신 분도 있을 겁니다. 이 ’빨갱이‘라는 말은 과거 냉전 시대에 공산주의자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입에 담기 꺼려하는 말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이념 논쟁의 시대가 아닌 평화와 화해의 시대가 오면서 아무런 거부감 없이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 제가 어렸을 때에 반공 포스터나 책에서 보았던 ‘빨갱이를 때려잡자.’라던가 ‘머리에 뿔난 붉은 소’ 이야기는 이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 네, 맞습니다. 이제 빨간색은 더 이상 공산주의만을 떠올리게 하는 색깔이 아닙니다. 얼마 전 <파.고.다.>가 한 리서치 기관에 의뢰해서 실시한 ‘빨간색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것은?’이라는 설문 조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2002년 월드컵’이라고 대답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설문 조사 결과를 나타내는 그래프가 자료 화면으로 나온다. ‘빨간색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것은?’이라는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은 1위가 2002년 월드컵으로 나타나고 피, 헌혈, 김치, 신호등, 일요일 등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 이런 시대 상황을 대변하는지 스스럽지 않게 ‘빨갱이가 되자’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할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김 피디의 말이 끝나자마자 흑백 화면으로 과거 빨치산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점점 컬러로 변화하는 화면은 각종 다양한 종류와 모양의 빨간색이 소개되고, 마지막으로 ‘Be the Reds' 티셔츠가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미리 녹화, 편집된 취재 장면이 나타난다.


- 우리는 ‘빨갱이가 되자’고 외치는 집단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그들은 누구이고, 어떤 이유로 빨갱이가 되려고 하는지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신변 보호를 요청한 제보자를 우리는 어렵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가명을 사용하고 음성 변조를 해 줄 것을 요구한 제보자에게서 우리는 비밀 집단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씩 풀 수 있었습니다.


화면으로 모자이크 처리가 된 제보자의 모습이 나타나고 자막으로는 신정(가명, 36세)라는 문구가 나타나면서 제보자의 음성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거 음성 변조되는 거 맞죠? 제가 이런 인터뷰를 한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저는 빨갱이에서 제외가 될지도 몰라요. 벌써 저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는 빨갱이 명단에서 영구 제명 되었습니다.”


- 빨갱이가 된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입니까?


“빨갱이요? 흐흐.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어요. 빨갱이냐? 빨갱이가 아니냐? 바로 이거죠. 소위 빨갱이가 되기 위해서는 그 어떤 특별한 힘이 있어야 해요. 국가 유공자이거나, 또는 고귀한 신분이거나, 또는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거나. 요즘 사람들은 빨갱이를 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너도 나도 빨갱이가 되고 싶어 하는 거죠.”


- 빨갱이가 되는 것이 어떤 자격을 얻는 거라면 이런 자격을 부여하는 곳이 따로 있는 것입니까?


“자격 부여요? 그건 당연히 정부 아닌가요? 대한민국 정부 말이죠. 그 잘난 정부의 높으신 분들이 1년에 한 번씩 우리를 분류합니다. 육질 좋은 소나 돼지의 몸뚱이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쇠로 낙인을 찍듯이 말이죠. 정부의 심사 기관의 심사를 통해 우리는 빨갱이인지 아니면 빨갱이가 아닌지로 분류가 됩니다.”


- 그렇다면 빨갱이가 되는 것과 그렇지 못하는 것의 생활이 다릅니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생활의 차이가 없다면 누가 그렇게 기를 쓰고 빨갱이가 되려고 하겠어요? 빨갱이가 되면 떡하니 사람들 앞에 자신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내세울 수 있죠. 거기다가 사람들은 빨갱이를 우러러보고 그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도 많아요. 매일매일 빨갱이를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하고요.”


- 그럼 빨갱이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그야 말 그대로 빨갱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평범한 생활을 하는 거죠. 그 누구도 잘 기억해주지 않는 그런 조용한 삶을 사는 겁니다. 그리고 내년의 심사에서 빨갱이가 되기 위해서 1년간 이를 악물고 노력하는 거죠. 그런데 참 우스운 것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빨갱이가 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누구는 출생 신분이 좋아서 평생을 빨갱이로 떵떵거리며 사는데 누구는 평생을 노력해도 빨갱이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제보자와의 인터뷰 화면이 멈추고 화면은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온다. 그리고 최성훈의 모습이 나타난다.


- 김 피디, 이거 충격적인 내용인데요? 아직도 신분제의 악습이 남아 있는 곳이 있군요.


- 네, 시청자 여러분도 방금 전의 인터뷰 내용을 보고 놀라셨을 겁니다. 저희 제작진 또한 이런 충격적인 사실을 방송으로 다루기 위해 지난 몇 달간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많은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였습니다. 저희는 소위 빨갱이가 되는 자격을 심사한다는 그 정부 기관의 관계자에게 수차례 인터뷰를 요청하였지만 관계자들과의 인터뷰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렵게 과거 심사 기관에서 근무했다는 사람과의 전화 인터뷰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화면은 다시 전화기가 돌아가는 모습으로 변하며 제작진과 심사 기관에서 근무했던 사람과의 전화 인터뷰 내용이 자막과 함께 음성 변조된 목소리로 나온다.


- 빨갱이가 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분류하는 정부 기관이 정말 존재하는 겁니까?


“그렇죠. 과거에 저도 그 기관에서 심사를 담당했습니다.”


- 심사 기준은 무엇입니까?


“심사 기준이요? 그건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되어 있어요. 과거에서부터 내려온 전통도 따져보고, 이 사람이 빨갱이가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발전에도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도 고려해보고요. 이외에도 여러 가지 내용을 다 따져본 후에 빨갱이가 될 사람들의 명단을 정하게 됩니다.”


- 이건 공산주의 사회와 같지 않습니까? 정부가 지나치게 한 사람의 인생까지 관여하는 것 아닙니까?


“과연 그럴까요? 정부가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정부가 정한 기준이 없다면 너도나도 빨갱이라고 소리치고 다닐 거라고요. 우리는 단지 우리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노력할 뿐입니다. 한 사회에 필요한 빨갱이보다 수가 늘어나려고 하면 그 수가 늘어나지 않도록 억제하고, 만일 그 반대의 경우라면 적절하게 빨갱이의 수를 늘리는 거지요. 요즘은 자기가 빨갱이가 아니면서도 빨갱이인양 착각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가진 사람도 많이 늘어났더군요. 빨갱이 옆에 있으면 자기도 빨간 물이 드는지 아는 사람 수가 늘어나고 있어요. 이건 무조건 선진국만 따라 가려고 해서 그래요. 우리 나름의 정체성도 없이 ‘선진국, 선진국’ 이러니까 지금 나라꼴이 이 모양 아니겠습니까?”


전화 인터뷰 화면이 정지하면 화면은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온다.


- 인터뷰 내용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 내용 중에 선진국을 따라간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빨갱이를 심사하고 분류하는 것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닌가보군요. 김 피디,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 그렇습니다. 우리는 취재 중에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빨갱이를 심사하고 분류하는 제도가 이미 전 세계에 공공연히 퍼져 있다는 사실이죠.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파헤치기 위해 외국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나라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았습니다.


화면이 전환되면 일본 나리타 공항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취재 차량이 이동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한 대학교의 건물이 보인다. 그리고 백발의 일본 대학 교수와의 인터뷰 장면이 계속된다. 인터뷰는 자막으로 보이는 동시에 우리말로 더빙 녹음이 되어있다.


- 빨갱이를 분류하는 제도가 일본에도 존재하는가?


“그런 제도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존재합니다. 사람들의 주 관심사이니까요.”


- 일본의 경우는 어떠한가?


“일본의 경우도 한국의 경우와 그 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빨갱이를 분류하는 기준과 빨갱이의 수는 크게 다르겠지요. 이런 빨갱이의 수와 선정 기준을 보면 그 나라 고유의 문화에 대해 알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 일본의 경우, 유명하거나 인기 있는 빨갱이도 있는가?


“네,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선호하는 것이 다르듯이 일본 내의 빨갱이의 인기 순위도 개인에 따라서 조금씩 다릅니다.”


일본 대학 교수와의 인터뷰 화면이 정지되면 화면은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온다.


- 인터뷰 내용 잘 보았습니다. 인터뷰 내용 중에 흥미로운 말이 있더군요. 빨갱이의 인기 순위가 있다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 네, 저희도 그 말을 흥미롭게 생각하였습니다. 빨갱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며 그것이 그 나라 고유의 문화까지 설명할 수 있다는 일본 대학 교수의 말은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 김 피디, 그렇다면 도대체 빨갱이의 정체가 뭡니까? 이제는 뭔가 확실히 설명할 때가 아닙니까?


- 네, 맞습니다. ‘파헤쳐 보고, 고민해 보고, 다시 보는’ <파.고.다.>의 진행 순서에 따라 지금까지 우리는 빨갱이에 대해 알아보고 그들의 정체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보는 일만 남았습니다.


- 그렇군요. 그럼 이제 다시 보도록 할까요? 시청자 여러분, 지금까지 보았던 방송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살펴보는 형식으로 오늘 프로그램을 마감할까 합니다. 빨갱이에 대한 해석은 시청자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럼, 다음 이 시간에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스튜디오에 앉아 있는 최성훈 아나운서와 김익선 프로듀서가 꾸벅하고 인사를 하면서 화면은 정지된다. 화면은 이동하여 텔레비전을 비추고 그 앞에 앉아 있는 30대 중반의 남자를 비춘다.


[이 방송 은근히 재미있는 걸? 빨갱이가 도대체 뭘까?]


그의 혼잣말이 끝남과 동시에 화면에는 커서가 깜빡이고 있다.


누구보다 먼저 게시판에 빨갱이의 정체를 밝히려는 당신의 손가락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 2009년 5월 14일 조약돌 고쳐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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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먼소리 2009/05/29 12:1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당췌 먼소린지

    •  address  modify / delete 2009/05/29 23:46 BlogIcon 조약돌(Joyakdol)

      이해가 안되셨다니 아쉽네요.
      다시 한 번 읽으실 여유가 되신다면,
      또 읽어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글은 다시 읽어보면 이해가 될 지도 모를(?)
      글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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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탄 풍경을 꿈꾸며


 

하얀 눈이 내리는 산 속에서 한 여자가 소리치며 흐느낀다.


“お元気ですか。私は元気です。”(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잘 지내요.)


이 장면은 이와이 순지 감독의 영화 <러브 레터(Love Letter)>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장면이고, 여배우의 대사는 많은 사람들이 따라 하기도 했던 명대사이다. 그리고 이 명대사는 지금 내가 2006 방일 대학생 대표단 일정 중 마에바시에서의 민박 가정 일정에서 인연을 맺은 나의 일본 어머니 아오키씨에게 보내는 메일의 첫 인사이기도 하다.


<러브 레터>는 순수함과 설렘이라는 느낌을 전해주는 말이다. 누구나 한 번쯤 러브 레터를 쓰거나 받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괜히 웃음이 나게 만드는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간직한 러브 레터. 지난 9박 10일간의 2006 방일 대학생 대표단의 추억은 한 장의 러브 레터가 되어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달콤한 러브 레터 중에서 한 구절을 펼쳐 보려고 한다.


영화 <러브 레터>에서 앞서 이야기했던 장면과 함께 내가 명장면으로 꼽는 장면은 자전거를 타고 가던 여배우가 자전거를 멈춘 후에 뒤를 돌아보는 장면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아, 그랬군.”하며 무릎을 탁 치며 느끼게 된 것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유난히 자전거를 타는 장면이 자주 나온 것 같다. 지금부터 공개할 나의 러브 레터의 한 구절도 자전거 이야기이다.


일본 사람들이 자전거를 많이 탄다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흔히들 알고 있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걸 경험해 볼 수 있는 방법은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신문, 잡지 등 다양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시나 일본으로 가서 직접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말 운이 좋게도 그런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번 2006 방일 대학생 대표단의 일정은 환경을 주제로 한 연수가 주요 프로그램이었다. 미래의 물 부족에 대비한 빗물의 연구, 폐식용유를 재활용하여 자동차 원료로 사용하는 소규모 공장 견학, 자연 체험 학습장에서의 나무 심기 경험 등 다양하고 유익한 프로그램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이번 연수를 통해 가장 놀라고 관심을 가진 것은 시내를 걷거나 버스를 타고 연수 장소를 이동하면서 본 일본 사람들의 자전거를 탄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풍경은 일본에 있는 기간동안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다.


아침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학교로 향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고, 낮에는 대형 할인 마트에서 산 물건을 싣고 이동하는 주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백발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자전거를 이동 수단으로 이용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녁의 시부야와 하라주쿠와 같은 번화가 거리에서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빈번히 마주칠 수 있었다.


자전거를 운동 기구로 자주 이용하는 우리나라의 경우와 달리 일본에서의 자전거는 하나의 이동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는 일본의 교통 요금이 비싸기 때문에 단거리 이동은 자전거를 자주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최근에 우리나라의 자전거 이용 실태를 조사한 자료를 보았는데 우리나라는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자전거의 이용률이 현저히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자전거 이용률이 높은 나라로 독일과 일본이 손꼽혔는데 나는 일본에서 내가 본 장면들을 생각하며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일본에서 대형 할인 마트 앞을 지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할인 마트 앞은 수 십대의 자전거가 마치 주차장의 자동차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자전거 전용 도로를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었고 그만큼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의 수도 많았다.


자전거야말로 환경 친화적인 이동 수단이자 건강에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도 자전거 전용 도로를 확충하고 자전거 도난 방지를 위해 자전거 등록제를 도입해보는 등의 노력을 한다면 일본에서의 자전거를 탄 풍경을 우리나라에서도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해본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학생들, 자전거를 타고 시장을 보러 가는 주부들, 자전거를 타고 함께 산책을 하는 노부부의 모습 등.


  오늘 나의 러브 레터는 이렇게 마침표를 찍으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담아 온 자전거를 타는 풍경은 영원히 나의 가슴 속에 남을 것이다. 일본에서 환경의 소중함에 대해 깨닫고 느낀 것을 실천으로 옮기겠다는 굳은 의지와 함께 지금 나는 두 바퀴 자전거를 이용해 세상을 누비는 꿈을 꾸고 있다.


- 2006년 11월 29일 조약돌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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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눗방울 담배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뱉었다

한숨과 걱정이

담배 연기가 하늘로 사라졌다



아이는 비눗방울을 분다

거품을 만들어

비눗방울을 만든다

꿈과 희망이 담긴

동그란 비눗방울이 하늘로 솟는다



아이를 부러워하며

유년을 그리워하며

나는

담배 연기를 내뱉는다

담배 연기는

비눗방울이 되어 하늘로 솟아오른다



오늘도 나는

비눗방울 담배에 불을 붙인다



2009년 3월 22일 조약돌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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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처럼 맑은
그대 마음

사랑에 상처 입고

조금씩 금이 가네요



유리처럼 투명한

그대 마음

이별에 아파하고

결국엔 산산이 부서졌네요



나 그대 몰래

깨진 유리 조각 모아

뜨거운 내 가슴으로 녹인 후

유리잔 만들어요



뜨거운 유리잔에

내 사랑 가득 담아

그대에게 드려요



영원히 깨지지 않을

뜨거운 내 마음을

그대에게 드려요




유리 조각 그대 - 10점
조용래 지음, 조은혜 그림/한국문학세상
사랑, 이별, 그리움에 관한 시 63편과 각각의 시에 어울리는 63개의 일러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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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눈물

내 가슴에

비 되어 내린다



그대의 작은 미소

내 얼굴을

환하게 만든다



태평양 위 나비의 날갯짓이

대서양의 폭풍을 일으키듯

그대가 떠난 후

내 마음은 텅텅 비었다



그대 다시

내 마음에 들어와

아름다운 그 날개

펄럭이기를



난 아직도 기다린다

그대라는 나비를

유리 조각 그대 - 10점
조용래 지음, 조은혜 그림/한국문학세상
사랑, 이별, 그리움에 관한 시 63편과 각각의 시에 어울리는 63개의 일러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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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town 바로가기 혈액형 살인 사건                      


내 이름은 신의진이다. 남들이 꺼리는 직업인 경찰이 나의 직업이다. 그것도 교통과 순경도 아닌 강력반 형사이다. 올해로 30살이 되는 내가 친구들에게 항상 듣는 말은 “너는 결혼하기 힘들겠다.”라거나 “그래서 내가 그때 교통과로 가라고 했잖아.” 따위다. 내가 경찰이 되기로 마음먹고 지원한 곳이 강력반이었을 때 홀로 나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펑펑 우셨다. 친구들도 나의 결정에 반대하며 나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나는 한 번 결심한 일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라서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반에 들어갔다. 나는 변변찮은 봉급과 목숨을 담보로 내어놓고 뛰어다니는 강력반 형사라서 항상 여자친구를 오래 사귀지 못한다. 나의 첫 인상에 반했던 여자들도 내가 범인을 잡기위해 잠복근무를 하는 동안 나를 떠나간다. 물론 이 기간을 견뎌낸 여자도 한 명 있었다. 설희라는 이름의 그녀는 내가 소매치기를 잡다가 칼에 찔려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후에도 나를 돌보다가 얼마 후에 더 이상 내가 다치는 모습을 못 볼 것 같다며 나를 떠나갔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나는 여자보다는 일을 더욱 사랑한다. 강력반에서 누구보다 우수한 형사가 되는 것이 나의 목표다.


강력반 생활 5년째 되던 날 하루 쉬게 되었다. 특별 휴가인 것이다. 강력반 생활 5년을 하는 동안 죽지 않은 것을 축하한다며 친구 녀석이 술 한 잔을 산다고 한다. 나는 그 녀석의 축하 아닌 축하를 받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휴대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살인 사건이 발생해서 출동한다는 선배 형사의 전화였다. 그 현장이 어디인지 물어봤지만 선배는 휴가나 마저 즐기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친구에게 미안하지만 먼저 가봐야겠다는 말을 하였고, 친구는 내년 오늘도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죽지 말라고 웃으며 인사하였다. 강력반으로 돌아온 나는 살인 사건 현장의 위치를 알아낸 후에 택시를 잡아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곳은 아파트 신축 공사 현장이었다. 이미 많은 취재진이 몰려와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하고 동료 형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신참 형사가 구토를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피살자는 매우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고정된 곳에는 천장에서 액체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붉은 빛깔이나 점도로 봐서 피가 분명한 액체는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액체가 떨어지는 발원지는 바로 공사판 모래를 거를 때 쓰는 체였다. 공중에 걸린 체에 고기 덩어리가 여러 조각 걸려 있었다. 범인은 피살자를 살해한 후에 시신을 토막 낸 후에 체에 걸려놓았다. 엽기적인 범행답게 현장에서 범인의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감식반의 감식 결과 피살자는 20년 동안 119 구조대원 활동을 해 온 46세의 남성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그가 며칠 전에 20년 동안 아무런 사고 없이 인명 구조 활동을 해온 것에 대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냈다. 토막 난 사체 중에 사건 현장에서 끝내 찾지 못한 것은 피살자의 아래턱이었다.


엽기적인 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반이 갖춰지고 있었다. 선배 형사들은 이번 살인 사건의 담당을 하지 않으려하는 눈치였고, 토막 살해당한 시신을 보며 구토나 하는 신참들이 이 사건을 맡는다는 것도 무리라는 결론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나는 반장님에게 이 사건은 아무래도 연쇄 살인 사건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고 말을 한 후에 이 사건을 맡고 싶다는 의견을 내어 보였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 사건의 담당 형사는 내가 되었다.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첫 번째 살인 사건이 일어난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피살자가 생겼다. 피살자는 도난당한 헌혈 버스에서 팔에 주사 바늘이 찔린 채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팔에 꽂힌 주사 바늘을 통해 피가 모이던 혈액봉투는 쏟아져 나온 피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너덜너덜하게 터져버렸다. 피살자는 헌혈용 침대에 꽁꽁 묶여있었기 때문에 범인의 범행에 저항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목에는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나는 감식 반에게 지난 살인 사건 피살자의 윗니 치열을 통해 컴퓨터로 아랫니 치열의 형태를 만들어 내라고 하였다. 감식반이 만들어낸 아랫니 치열과 두 번째 피살자의 목에 난 이빨 자국은 90프로 이상 일치했다. 범인이 첫 번째 피살자의 아래턱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분명해졌고 이번 일은 연쇄 살인 사건이 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미 예상한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 피살자는 며칠 전에 헌혈을 많이 한 공로를 인정받아서 대한 적십자사에서 표창을 받았음이 밝혀졌다. 첫 번째 피살자와 두 번째 피살자가 사회에 봉사한 공로를 인정받아 상을 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진 것으로 판단된 이상 수사의 초점은 거기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연쇄 살인 사건의 다음 범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번 사건 수사를 기회로 삼아서 승진할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쇄 살인 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나야만 한다. 이런 나의 마음을 범인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한동안 조용하더니 다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사체는 외진 산길에서 발견되었는데 피살자는 20대 후반의 여성 의사였다. 그녀는 낙태 반대 운동을 하는 시민 단체의 공동 대표 중의 한 사람이었다. 범인은 역시 밝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만 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체 부검 결과 피살자에게서 지난 번 피살자와 똑같은 이빨 자국이 발견되어졌고 왼쪽 팔에서 주사 바늘 자국도 발견되어졌다. 피살자의 사인은 주사 바늘을 통해 피가 과다하게 빠져나간 과다출혈로 인한 심장 쇼크였다. 그리고 그 외에 성폭행을 당한 흔적을 찾아냈다. 피살자에게 남겨진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정액과 음모가 발견된 것이다. 이것으로 수사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에 범인의 정액과 음모를 이용한 DNA 감식이 의뢰되어졌다. 


DNA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또 다른 피살자가 생겨났다. 목덜미의 이빨 자국과 팔에 난 주사 바늘 자국으로 보아 같은 범인의 연쇄 살인이 분명했다. 그리고 어렵게 막아두고 있던 매스컴이 순식간에 터져버렸다. 네 명의 피살자가 살해당한 방법이 언론을 통해 일반인에게까지 자세하게 알려졌고 사회는 공포에 빠졌다. 피를 빨아 먹는 흡혈귀가 출현한 것이 아니냐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동안의 범행 방법으로 보아 가능도 한 이야기였지만 경찰의 입장에서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또 다른 미해결 사건이 나올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경찰청은 긴급 대국민 발표를 통해 수사 현황을 발표했다.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범인의 DNA 감식 결과만 나오면 된다는 것이었다.


DNA 감식의 결과물을 기존의 유사 범죄자들의 것과 비교 대조해 본 끝에 DNA 지문이 일치하는 유력한 용의자를 체포할 수 있었다. 그는 살인과 강간 등의 혐의로 3차례나 복역을 한 후에 모범수로 풀려났던 30대 중반의 남성이었다. 경찰청은 집에서 잠을 자고 있던 용의자를 체포하는 장면을 한 방송국에 동행 취재를 하게 하였다. 그 장면을 본 시민들은 공포의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경찰청을 지지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용의자는 자신이 여의사를 성폭행했음을 인정했지만 살인 혐의는 완강히 부인하고 있었다. 살인 전과가 한 번 있는 그가 이번에 살인 사건으로 기소되면 사형수가 될 것이 분명했기에 그의 혐의 부인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같은 유형의 범죄가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범인의 범행 방법과 사체에 남기는 이빨 자국이라던지 주사 바늘에 대한 이야기는 매스컴을 통해 누구나 접할 수 있었기에 일어난 모방 범죄였다. 유력한 용의자가 체포된 상태에서 일어난 모방 범죄 피살자의 사체에 남겨진 이빨 자국의 치열은 기존의 것들과 일치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모방 범죄를 막고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서는 용의자의 자백이 필요했다. 하지만 용의자는 네 명의 피살자가 살해당한 시각의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었다. 여의사를 성폭행한 후에 도망쳤고 여의사의 사망 시각으로 추정되는 시각의 알리바이도 완벽했다. 사건은 다시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에서 이번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법의학자를 파견하겠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나는 강력반 반장님을 통해 법의학자의 파견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내가 맡은 사건인 만큼 나만의 방식으로 해결하고 싶다는 주장을 하였지만 반장님도 법의학자의 파견을 막을 힘을 가지지는 못했다. 파견 나온 법의학자는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자신을 김수현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이번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한 정보를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범인은 피에 대한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고, 사회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꼼꼼한 성격을 가진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의 남성이다. 현재 체포된 용의자도 그녀의 주장에 딱 들어맞았지만 그녀는 그는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나는 그녀와 함께 그동안의 사건 현장을 돌아보았다. 더 이상의 단서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뭔가를 알아낸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가 알아낸 사실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유력한 용의자가 갇혀 있는 상태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단순한 모방 범죄라 생각했던 수사반은 피살자의 사체의 목덜미에 남은 이빨 자국이 기존의 연쇄 살인 사건의 것과 일치한다는 감식반의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피살자의 팔에도 주사 바늘 자국이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은 피살자의 피를 이용하여 범인이 메시지를 남겨놓은 것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연구실의 벽에 “날 잡을 수 있을까?”라는 말이 써져 있었다. 그 메시지를 본 수현은 그 메시지는 범인이 자신을 향해 남긴 것이 분명하다는 말을 하였다. 그동안의 범행의 피살자가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었던 점에 비해 이번 피살자는 그냥 평범한 시민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담배를 꺼내어 물고 고민에 빠져있던 나에게 수현이 다가와 피살자들의 공통점을 알아냈다고 말하였다. 피살자들의 혈액형이 모두 O형으로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하는 생각에 주먹으로 벽을 치며 자책을 하고 있었다. 수현은 피가 흐르는 내 손을 잡아채며 걱정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법의학자의 파견을 반대했던 나의 오만함과 수현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그녀의 눈을 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수현이 피살자들의 공통점을 알아낸 이후에 더 이상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가끔씩 나에게 질문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연쇄 살인 사건이 아닌 나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았고, 나도 어느 정도 그녀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가 내어 놓는 범인의 성격이나 특성이 나를 모델로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의심을 털어내기 위해서는 빨리 범인을 잡아야했다. 그리고 그 기회는 곧 찾아왔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었다. 연쇄 살인 사건의 마지막을 알리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날이었다. 신고를 받고 뒤늦게 출동한 나와 수현은 사건 현장에서 두 구의 시신을 볼 수 있었다.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20대 초반의 O형 남성이 피살자였는데 목덜미의 이빨 자국이나 팔의 주사 바늘 자국이 앞서 피살자의 사체에서 발견된 것과 완벽히 일치했다. 피살자의 바로 옆에는 피살자의 팔과 자신의 팔의 혈관을 긴급 수혈 장치로 연결시킨 채 숨져 있는 범인이 있었다. 범인은 20대 후반의 남자였는데 사인은 혈액 응고로 인한 심장 마비였다. 그의 가방 안에서 처음으로 살해당했던 구조대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살점은 이미 썩어버린 아래턱과 치열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의 일기장에서는 여자 친구가 자신을 버린 이유가 자신이 성격이 소심한 A형이기 때문이라고 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새로 생긴 남자가 O형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 O형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글도 있었다. 이로써 범인은 잡혔고 연쇄 살인 사건의 수사는 종결되었다. 비록 완벽한 사건 해결은 아니었지만 연쇄 살인 사건은 끝이 났다.


수사가 종결되고 그동안의 사건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다. 나는 연쇄 살인 사건 수사 종결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3일의 특별 휴가를 받게 되었다. 나는 수현에게 함께 여행 갈 것을 제안했고 그녀도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우리는 인적이 드문 산장으로 둘 만의 여행을 떠났다. 그녀와 함께 와인을 한 잔씩 마신 나는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그녀의 말을 들은 후 우린 몸을 섞었다.


“사람의 혈액형이 바뀌는 경우에 대해 알아?”


침대에 누운 채 그녀를 바라보며 웃던 나는 그녀에게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리고 그녀는 법의학자의 지식을 동원한 명쾌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골수 이식을 한 후에 혈액형이 바뀌는 사례가 자주 발견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외에도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 거라며 그녀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나는 O형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A형이다.


초등학교 때 나는 학교에서 혈액형 검사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A형이었다. 나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에게 자랑스럽게 이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기뻐하기는커녕 화를 내며 내 혈액형은 O형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도 나는 O형이라고 말해야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듣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A형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어머니는 나의 종아리를 때렸다. 나는 그렇게 O형이 되었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중학생이 된 후에 나는 나의 혈액형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B형이고, 아버지는 O형이었기에 내가 A형으로 태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제나 따뜻하게 나를 감싸주는 아버지의 사랑이 점점 부담감과 미안함으로 바뀌게 되는 일을 알게 된 그 순간을 나는 평생 증오하게 되었다. 그날은 우리 집에 어머니의 대학 동창들이 놀러온 날이었다. 동창들의 대화를 통해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하기 얼마 전까지 만나던 남자가 A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내가 그 사람과 어머니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라는 사실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고 아버지에게는 O형 아들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혈액형에 대한 나의 강박 관념은 심해져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우리 가족은 교외로 나들이를 가게 되었다. 한적한 시골 도로를 달리던 중에 차에 문제가 생겨서 아버지는 차를 세우고 뒤에 오는 차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나와 어머니는 차 안에서 쉬고 있었고 시골 도로라서 차는 자주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음주 운전이었던 소형 트럭이 아버지를 치어버렸다. 나는 놀라서 차 밖으로 뛰어나갔고 어머니는 서둘러 119에 신고를 했다. 아버지는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고, 뒤늦게 도착한 119 구조대가 가진 혈액으로도 수혈을 했지만 피가 모자란 상황이었다. 구조대원이 가족 중에 아버지와 같은 O형 혈액형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물어 보았다. 나는 그에게 내가 이 사람의 아들이고 O형이니 내 피를 수혈하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혈액형에 대한 간단한 검사도 없이 내 피를 아버지에게 바로 수혈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A형인 내 피가 들어가자 혈액 응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의료 사고임을 숨기려는 119 구조대와 내가 다른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숨기려는 어머니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약간의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덮어졌다. 하지만 나의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를 사랑으로 보살펴준 아버지를 내 손으로 죽인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나의 피가 더럽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갔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죄책감을 덜어보려는 의도로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경찰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목숨보다 정의 사회 구현에 앞장 서는 경찰이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잡지에서 20년 동안 아무런 인명 사고 없이 구조 활동을 해온 한 119 구조대원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해맑게 웃는 표정의 그의 모습을 난 또렷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나의 더러운 피로 아버지를 죽게 만든 그때의 그 구조대원이었다. 그리고 나는 범행을 시작했다. 복수가 끝난 후 나는 아버지와 같은 O형 피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순결한 O형 피를 가진 이들의 피로 나의 혈액형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범인인 동시에 그 범인을 쫓는 형사 역할을 하느라 그동안 고생이 많았고, 거기다가 나를 의심하는 수현을 만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수현은 나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나의 어린 시절 아픔을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듯한 그녀의 표정이 나를 더욱 분노하게 했다. 나는 그녀의 혈액형이 O형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이곳 산장으로 데려온 곳이다. 여기 산장 안에 그동안 죽였던 사람들의 피를 혈액 봉투에 담아 모아 놓았다. 그리고 수현의 피까지 함께 모아 나는 오늘 나의 혈액형을 바꿀 것이다. 내 더러운 A형 피를 뽑아내고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피와 함께 나를 사랑하는 그녀의 O형 피를 집어넣을 것이다. 그녀의 팔에 주사 바늘을 꽂았다. 그녀의 비명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 2006년 1월 조약돌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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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또자쿨쿨 2009/02/15 09:3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직접 연재하시는 글인가봅니다... 오....
    안녕하세요.
    블로그검색 온타운 쥔장입니다.
    기부블로거까지 다 처리하셨네요~~
    등록하였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ontown 바로가기 혈액형 살인 사건



올해로 형사 생활 15년이 된 나는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그날의 그 사건을 떠올리곤 한다. 내가 맡은 첫 사건이기도 했던 그 일이 떠오르면 내 몸은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낀다.



1. 비가 내리는 겨울날



혈액형에 관한 영화가 개봉했던 해의 겨울이었다. 겨울에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그 해는 나에게 정말 특별한 해였다. 어렸을 때부터 경찰의 꿈을 가지고 살아온 내가 경찰의 꿈을 실현한 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맡았던 첫 사건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몇 달간의 대기 기간 후 경찰서에 발령을 받은 나는 주저하지 않고 강력반에 지원했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강력반보다는 교통과에 지원하기를 권유하였지만 누구보다 투철한 정의감에 불타던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시작된 강력반의 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험상궂은 얼굴과 우락부락한 몸을 가진 강력반 형사는 몇 명 되지 않았다. 내가 선배로 모시게 된 사람들은 자상한 인상에 평범한 직장인으로 생각될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강력반 생활은 막이 올랐다.



일반 회사로 치면 수습 기간으로 여겨질 기간을 보내면서 나는 강력반 선배들을 따라 다니며 많은 것을 배웠다. 조서를 작성하는 법부터 시작해서 - 선배들 중 한 명은 독수리 타법이지만 누구보다 조서를 빠르고 정확하게 작성했다 - 용의자를 다루는 법, 잠복근무를 하는 방법 등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나도 이제 단독으로 사건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비가 내리는 겨울날이었다. 어제까지 추웠던 날씨가 오늘은 풀린 것인지 눈이 아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난 번 폭설 이후로 눈에 대한 낭만이 사라지고 오히려 비를 기다리던 내 마음 속 반가움은 나를 문 밖으로 이끌어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내리는 비와 함께 사색에 잠기려던 찰나였다.



“이봐, 신 형사. 자네가 맡을 첫 사건이네. 드디어 단독 수사구만. 축하하네.”



사건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 축하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 그건 바로 그 누군가의 불행을 의미하니까 -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떤 사건입니까?”



과연 내가 맡을 첫 사건은 어떤 사건일까? 나는 기대와 함께 왠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었다.



“살인 사건.”



이제는 익숙해진 것일까. 강력반에 뼈를 묻은 지 15년이 되었다는 선배는 웃는 얼굴로 살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2. 흡혈귀 출현



내가 맡은 사건은 정말 이상한 살인 사건이었다. 피해자는 20대 중반의 남자였는데 그의 방 안에서 변사체로 발견 되었다. 특이한 점은 그의 피가 증발해버린 것이다. 증발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피가 사라져 버린 것을 달리 어찌 표현한단 말인가. 부검 팀에 의하면 그의 공식적인 사인(死因)은 끈에 의해 목이 졸려진 질식사였다. 서서히 산소가 부족해지면서 숨이 멎어가는 동시에 과다 출혈로 심장이 멎었다는 것이다. 그의 왼쪽 팔뚝에는 굵은 주사 바늘로 찌른 듯한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누가 무슨 이유로 그의 피를 뽑아간 것인가? 이런 의문에 빠져 있던 나는 뒤늦게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목덜미 뒤에 난 상처가 끈에 의해 파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바로 이빨 자국이었다.



‘누군가 그의 목에 날카로운 이를 꽂고 피를 빨아 먹었다는 말인가?’



이런 추측은 내가 아닌 누구라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럼 이건 영화에서나 보아왔던 흡혈귀의 소행이란 말인가. 사건은 시작부터 미궁에 빠져 들고 있었다. 피해자 주변 인물들의 치열을 시신에서 발견된 치열과 대조해보았지만 아무런 공통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언론은 혹독할 정도로  경찰을 비난하고 있었다. 그리고 흡혈귀의 출현 소식에 사람들은 경악하였고 공포심에 사로 잡혀 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같은 유형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20대 초반의 남성이 목숨을 잃었다. 이전 사건과 같은 방법이었고 시신에서 발견된 목덜미 뒤의 이빨 자국과 팔뚝에 난 주사 바늘 자국도 그 전의 것과 일치했다.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들의 치열은 이번에도 일치하지 않았다. 또 다시 언론은 점점 미궁에 빠져만 가는 사건을 집중 보도했고 무능한 경찰을 타깃으로 연일 공격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내가 있었다. 이 흡혈귀 사건을 맡은 신참 형사에 대한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차라리 이때 이 일에서 손을 떼야 했었는데…….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같은 유형의 사건이 일어났다. 개중에 모방 범죄도 있었지만 변사체의 치열과 바늘 자국이 일치하는 살인 사건이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일어나고 있었다. 피해자는 20대 남성이라는 것을 빼고는 공통점이 없었다. 사건 발생 지역도 경기도 전역이었기에 잠복근무라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게 사건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을 때 수사를 다른 형사에게 넘기라는 압력이 상부로부터 내려왔다. 나는 나의 자존심을 걸며 수사를 넘길 수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그때 내가 수사를 계속해서 할 수 있게 해준 단서가 발견되었다. 너무 사소하게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버렸던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피해자들의 혈액형이었다. 그들의 혈액형은 O형으로 모두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수사의 방향은 최근에 O형 혈액을 수혈 받은 이들을 중심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3. 사건 해결, 그리고…….



수사의 방향이 바뀌고 나서도 또 다른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게 되어 수사권을 다른 형사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했던 점은 그 이후로 유사 사건이 발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굶주렸던 흡혈귀가 배를 채우고 그의 성으로 돌아갔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문이 나돌았다. 밤늦은 시간에 외출을 꺼렸던 사람들은 이제 다시 밤의 유흥을 즐기고 있었다. 특히나 공포심에 떨었던 전국의 O형 남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언론도 더 이상 이 사건에 대해서 크게 떠들지 않았고 경찰도 이 사건을 미해결 사건으로 돌리며 수사 규모를 축소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때 경찰을 조롱하려는 듯 마지막 사건이 발생했다.



마지막 사건의 현장에서는 두 구의 시신이 발견 되었다.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20대 중반의 O형 남성이 침대에 누워 싸늘한 시선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의 옆 침대에서 용의자로 추정되는 20대 후반의 남자 시신이 발견 되었다. 그의 왼쪽 팔뚝에는 주사 바늘이 꽂혀 있었고 그것을 통해 O형 혈액이 수혈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 안과 식도, 위장에서 O형 혈액이 발견되었다. 부검 결과 O형 남성의 사인(死因)은 이전과 같았다. 용의자 남성의 혈액형은 A형이었는데 그의 사인(死因)은 혈액 응고였다. 그리고 모든 사건의 전말은 용의자의 일기장을 통해 밝혀졌다. 그의 여자 친구가 그에게 이별을 선언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의 혈액형 때문이었다. A형 남자는 소심하여 남자 친구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그녀의 이별 선언이 모든 일의 발단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새로운 남자 친구가 생겼는데, 그의 혈액형이 O형이었다는 것이 O형 남성들이 피해자가 된 이유였다. 용의자는 O형 혈액을 계속해서 수혈 받아 자신도 O형이 되면 그녀가 자신을 다시 받아 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수차례에 걸쳐 O형 혈액을 수혈 받은 그는 마침내 혈액이 응고되어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고 미궁에 빠질 뻔했던 사건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



“선배님.”



잠시 옛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옆자리에 앉은 신참 형사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오늘로 잠복근무 7일째, 차 안에서만 생활해서인가 갑갑함을 느끼던 차에 때마침 비가 내렸다. 한 겨울에 내리는 비는 색다른 운치가 있다. 차창을 잠시 열어 내리는 비에 손을 적신다. 시원하다.



형사 생활 15년 동안 내가 해결하지 못한 사건은 없었다. 이제 나도 웃는 얼굴로 살인 사건을 입에 담을 수 있게 되었고 용의자의 얼굴 표정만 봐도 그의 진술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나에게 아무도 알지 못하는 미해결 사건이 하나 있었다. 용의자를 알지만 잡을 수 없었던 기묘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은 그 사건이나 해결해 볼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봐 신참. 자네 혈액형이 뭔가?”



“O형입니다.”



“그렇군. 자네는 태어날 때부터 O형이었나? 사람의 혈액형이 변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 나처럼 말이지.”



차창 밖으로 내밀었던 겨울 파카가 젖어버린 후에야 나는 차창을 다시 올렸다.



“히터 좀 잠시 틀지. 옷을 말려야겠어.”



“네, 선배님.”



나는 겨울 파카를 벗어 뒷좌석에 걸어 둔다. 겨울 파카 안에 입은 반소매 차림이 이상한 듯 신참 녀석이 힐끗힐끗 거린다. 나는 비에 젖은 오른손으로 왼쪽 팔뚝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이제는 아물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아물지 않은 굵은 주사 바늘 자국을 손톱으로 긁던 내 오른손은 신참 형사의 목을 향해 뻗어 나간다.



- 2005년 5월 18일 조약돌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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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른 두 살의 평범한 직장인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모님과 그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아침 식사를 한다. 내가 출근을 하기위해 집을 나설 때면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은 “오빠, 올해는 꼭 장가가야지?”라는 입에 밴 말을 하며 인사를 한다. 나는 여동생을 바라보며 한 번 살짝 웃어주고 손을 흔들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차고로 가서 작년 내내 고생하며 할부금 납부를 끝낸 나의 애마인 흰색 승용차에 오른다. 시동을 켜면 들려오는 것은 “안녕하세요,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라는 멘트로 시작하는 라디오 방송이다.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곡을 들으며 내 애마와 함께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을 가르며 달린다. 그렇게 20여분 운전하면 도착하는 곳은 작은 무역 회사 건물이다. 이곳이 올해로 4년째 다니게 된  나의 직장이다. 회사에 출근하면 항상 나보다 일찍 와 있는 미스 김은 “안녕하세요, 홍 대리님.”하며 인사를 건넨다. 그럼 나는 안녕하세요,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웃으며 대꾸한다. 곧이어 출근할 신 과장은 “홍 대리, 오늘 무슨 좋은 일 있나봐?”라고 인사할 것이고, 남 부장은 “홍성루씨, 내가 좋은 맞선 자리 알아놨는데 생각 있으면 말하게나.”라 말하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릴 것이다. 나의 하루는 그렇게 매일 같은 식으로 시작한다. 나는 오전에는 매일 반복되는 듯한 서류 정리 작업을 하며 보낸다. 가끔은 어제 정리했던 서류가 오늘 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점심시간에는 “어이구, 이 총각 참 마음에 든다니까. 내가 딸자식만 있었어도.”라고 말을 하며 밥 한 그릇을 더 건네주는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의 식당에서 된장찌개와 함께 밥을 먹는다. 일보다는 춘곤증과 싸웠다고 하는 것이 더 나을 오후의 업무가 끝나고 퇴근 시간이 되면 입사 동기인 이 대리는 “성루야, 오늘도 그냥 가려고? 이런 날 한 잔 해야 하는 거야.”라며 손을 들어 소주잔을 꺾는 모습을 해 보인다. 그의 권유를 뿌리치고 다시 나의 애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나를 맞아주신다. 어머니와 함께 텔레비전을 잠시 보다보면 ‘따르릉’하고 전화벨이 울린다. 친구와의 약속이 있어서 늦게 들어온다는 여동생의 전화다. 곧이어 울리는 전화벨 소리의 주인공은 거래처 사장의 접대가 있어서 새벽에나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아버지다.


이렇게 반복되듯 지루한 나의 일상에서도 내가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나의 좌우명 때문일 것이다. 나의 좌우명은 “nowhere”다. 보통 사람들은 “노웨어“라고 읽는 이 영어 단어를 나는 “나우히어“라고 읽는다. “노웨어,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는 비관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는 “나우히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사는 곳이 바로 유토피아적 세계이다. 그리고 나의 좌우명은 내가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4년제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나를 돋보이게 하는 좌우명이라는 생각에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속으로, 때론 입 밖으로 이 단어를 되뇌며 뿌듯함을 느낀다. 그 외에 내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특별한 취미활동을 가지지 않고 있다. 한 가지에 취미활동이라고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틈이 날 때마다 보는 영화 정도일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짐 캐리가 주연을 맡았던 ”트루먼 쇼“이다. 결혼한 아내가 있는 트루먼이라는 이름의 샐러리맨이 그동안 자신의 삶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거짓 삶이었음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내용이다. 나는 이런 기발한 상상력을 가진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를 존경하게 되었고, ‘내가 만약 트루먼과 같은 입장이었다면?’하고 생각하며 홀로 피식 웃어보기도 하였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트루먼과 같은 거짓 삶이 아닌 반복되듯 지루하기는 하지만 진짜 삶을 살고 있음을 느끼고 어딘가에 있을 이름 모를 신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내 방은 내 또래의 보통 남자들의 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편에 흰색 옷장이 있고, 옷장 안은 몇 벌의 정장과 정장의 색깔에 맞추어 골라 입을 형형색색의 와이셔츠와 넥타이로 가득 차 있다. 옷장 안 한 구석에는 가끔 회사에서 친목도모 수단의 일환으로 열리는 등반 대회에 참여하기 위한 등산복이 깨끗이 세탁되어 놓여져 있다. 이제 내 옷장 안에서 캐주얼 복장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캐주얼이라면 집 안에서 입을 정도의 가벼운 운동복 정도 밖에 없을 것이다. 옷장의 맞은편에는 침대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하늘색 침대 시트가 말쑥하게 덮여있다. 방문 맞은편에는 창문이 있다. 5월의 햇살을 따뜻하게 받아들여야할 창문은 지금 내가 내려놓은 회색 블라인드 때문에 방과의 소통이 막혀 있다. 나는 빛을 막는 대신 살짝 창문을 열어두어 봄바람이 방 안으로 조금씩 스며들게 해 놓았다. 방문의 오른편에는 작은 책상과 의자가 있고 책상 위에는 노트북 한 대가 놓여 있다.


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정장 상의를 벗어 침대 위로 던졌다. 주름 하나 없이 말끔히 덮여 있던 하늘색 침대 시트에 조금 주름이 졌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오른쪽 검지로 노트북 전원 버튼을 눌렀다. 컴퓨터가 부팅이 되는 동안 두 팔을 모아 깍지를 끼고 하늘 높이 쭉 뻗어 기지개를 한 번 폈다. 정겨운 윈도우 시작음과 함께 컴퓨터가 시작되자 어제 다운로드 받았던 최신 팝송을 윈앰프를 통해 재생시켰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노트북에 연결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겼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하얀 순결의 세상.


“전화 받으세요.”


휴대전화의 귀여운 아기 목소리 벨소리가 나를 다시 현실로 불러들였다.


여보세요.


“성루씨, 저에요.”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나의 연인, 그녀의 목소리였다. 남자 나이 서른두 살. 보통 내 나이대의 남자들은 결혼을 전제로 하고 이성교제를 하고 있었지만 나와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서로를 사랑한다기보다는 조금은 필요에 의한 교제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우리는 필요한 때에만 만나는 연인 사이였다. 그녀는 내일 스승의 날에 즈음하여 그녀의 초등학교 은사님들을 모시는 동창회가 있으며 그 모임은 연인이나 부부를 동반하는 모임이라는 사실을 마치 회사에서 업무를 나에게 브리핑하듯 말을 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나는 내일 약속 시간에 늦지 않을게라는 말을 했지만 이미 전화는 끊어진 후였다. 가만히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바라보던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노트북에 연결된 마우스를 손에 쥐고 윈도우 화면의 시작 버튼으로 마우스 커서를 옮겼다. 노트북을 끄려던 나는 내일 그녀와의 약속이 생각나서 시작 버튼 위의 마우스 커서를 윈앰프로 옮겨 흘러나오는 팝송을 반복 재생될 수 있도록 설정하였다. 내일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긴장하지 않기 위해서 오늘 밤은 음악을 이불 삼아 편안하게 자기로 한 것이다. 샤워를 한 후에 잠옷으로 갈아입고는 전원 스위치를 내려 방의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편안한 멜로디가 귓가를 스치고 나는 달콤한 잠에 빠져 들었다. 꿈속에서 내가 본 것은 모든 것이 하얀 순결의 세상.


아침에 눈을 뜨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나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평소와 조금은 다른 면도 있었다. 평소처럼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며 아침 식사를 하였는데 오늘은 엉터리 일기 예보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오빠, 올해는 꼭 장가가야지?”라고 인사해야할 여동생은 아직 자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여동생이 다니는 회사는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었고, 내가 4년째 다니고 있는 작은 무역회사는 그렇지 않다는 작은 차이가 나와 동생의 토요일 아침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놓았다. 토요일이라서 한 시간 늦게 출근하는 탓에 나의 애마에 올라 시동을 켜면 들려야할 “안녕하세요,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라는 멘트로 시작하는 라디오 방송은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시길 바랍니다.”라는 마지막 멘트로 마무리가 되고 있었다. 회사에 도착하자 미스 김이 “홍 대리님, 오늘 데이트 있으신가 봐요?”라고 웃으며 반겨주었다. 오늘 여자 친구의 동창회를 생각해서 조금 신경을 써서 옷을 입었기 때문인지 신 과장과 남 부장의 인사말도 내 옷차림에 관련된 것이었다. 오늘은 아침 업무, 점심 식사, 오후 업무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저녁의 약속에 계속 신경 썼기 때문인 것 같았다. 사실 그녀의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고 그래서인지 어떤 실수를 하지 않을까하는 긴장감에 사로잡혀 하루를 보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이 대리가 “성루야, 오늘 모임도 잘 하고 와.”라고 말하며 오른손을 높이 들어 파이팅을 외친다. 나는 친구의 응원을 뒤로 한 채 약속 장소로 향했다.


“홍성루씨, 여기에요.”


나를 마중 나와 있던 것인지 그녀가 손을 들어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나의 팔짱을 낀다. 그것이 전부이다. 우린 별다른 대화도 나누지 않고 동창회 모임의 분위기에 젖어 들고 있었다. 가끔 그녀의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하고 명함을 주고받으면서 나누는 의례적인 대화가 오고 갈 때만 그녀가 나를 보며 웃을 뿐이었다. 우린 역시 필요에 의해 만나는 사이일 뿐이다. 동창회가 끝났고 여전히 내 팔짱을 낀 그녀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나도 가끔 고개를 숙이는 정도의 가벼운 인사를 하였다.


우리도 이만 갈까요?


나의 말에 그녀가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나에게 팔짱을 낀 손을 비 오는 날 빨래 걷듯 재빨리 빼내었다. 그리고는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 나의 제의를 거절한 채 “홍성루씨, 오늘 감사했습니다.”라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는 택시를 잡아타고 사라졌다. 나는 그녀를 붙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나의 애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뿐이다. 집으로 돌아온 나를 반기는 것은 텔레비전 방송의 주말 연속극을 보고 계시는 어머니이다. 다녀왔습니다. 나는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가서 방문을 연다.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와 책상이 나를 반기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내일은 회사에서 야유회 가는 날이군. 피곤해서 가기 싫은데. 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은 서서히 사라지고 눈앞이 서서히 하얗게 변한다. 온 세상이 눈이 내린 듯 하얗다.


일요일.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홍 대리님, 비 때문에 오늘 야유회 취소되었어요.” 김연주씨 - 내가 항상 미스 김이라 부르는 - 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운 적은 없었다. 회색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창 밖을 보니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달콤한 봄비였다. 무엇보다도 가기 싫었던 야유회가 취소되게 만들어준 고마운 봄비였다. 나는 회색 블라인드를 내려놓고 봄비가 가져다준 오랜만의 휴식에 내 몸을 맡긴 채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가만히 누워있다 창가로 손을 뻗어 회색 블라인드를 다시 한 번 걷어 올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봄비 소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내가 살아 있음을 감사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다. 나우히어. 


달콤한 휴식 후에 나를 찾아온 것은 달콤하지 않은 월요병이었다. 오랜만에 긴장감에서 벗어났던 내 몸의 근육들은 이완된 채 다시 수축하지 않으려하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방 안 가득 울리는 알람시계 소리를 무시하고 마치 시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누워있고 싶었다. 하지만 영혼이 육체를 떠나버린, 이제는 누구의 곁으로 움직일 수도 없게 된 시체처럼 어디에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은 싫었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침대를 벗어났다. 아침 식사를 하며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고, 여동생의 배웅을 받고, 똑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고, 같은 건물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같은 인사말을 나누며, 같은 업무에 같은 일상. 나의 무료한 하루는 그렇게 흘러갔다.


월화수목금토


내 삶의 놀라운 사건이 기다리고 있는 일요일을 향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친구의 결혼식이 잡혀 있는 일요일을 향해.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목요일에는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문상을 다녀왔었다. 일요일의 결혼식을 생각했었다면 가지 않는 것이었는데. 가족과 친지의 결혼식 전에는 문상을 다녀오지 말라는 금기를 기억했어야 했는데……. 사실 결혼식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문상을 다녀온 후인 금요일이었지만 말이다.


친구의 결혼식에 가기로 한 일요일 아침, 해가 떠올랐다.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봄의 기운을 가득 담은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오늘은 결혼식이 많이 잡히는 길일(吉日) 중의 길일이라는 말이 생각나니 몸 속 깊이 좋은 기운을 가득 받아들인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아침밥을 혼자서 먹었다. 부모님은 새벽 일찍 동네 사람들과 부부 동반 야유회를 떠나셨다. 구김 하나 없이 잘 다려진 흰색 와이셔츠를 꺼내어 입고 하늘색 넥타이를 맸다. 이제 상의와 바지만 입으면 출발 준비는 끝이다. 검은색 정장을 입으려다가 지난 목요일 문상을 갈 때 입었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대신에 화사한 하늘색 정장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하늘색 넥타이를 풀고 분홍색 넥타이를 골랐다. 책상 서랍 안에서 흰색 봉투를 하나 꺼내 어제 은행에서 찾아온 빳빳한 새 지폐를 넣었다. 문상에 이어 결혼식이라니, 이번 달은 적자군. 한숨을 내 쉰 후에 집을 나섰다. 비록 내가 가진 돈은 줄어들지만 나의 마음은 넉넉해진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의 애마와 함께 결혼식장으로 가는 길에 이삿짐센터 용달차를 많이 볼 수 있었다. 길일 중의 길일이라 이사를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인가 보다. 결혼식장에 도착해서도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결혼식장 입구의 안내용 게시판에 붙어 있는 종이에는 친구의 결혼식 이전과 이후에도 빽빽이 결혼식 일정이 적혀 있었다. 나는 친구의 이름을 발견한 후에 한 번 웃었다.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내 신세가 우스워서인지, 5월의 신부를 맞이할 친구가 부러워서인지 이유 모를 웃음이었다. 나는 로비에서 검은색 턱시도를 차려입은 친구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축하의 말을 전하며 손을 내밀었다.


“누구시죠?”


친구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녀석, 결혼한다고 긴장했구나. 결혼식 때문에 정신없는 친구의 입장이 이해가 되기는 했지만 조금은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나는 악수를 하기 위해 내밀었던 손을 얼른 호주머니에 넣으며 웃었다.


“아, 홍성루씨죠? 미안해요, 정신이 없어서요. 오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는 미안해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 친구와 악수를 하였다. 축하해. 행복하게 살아. 친구의 눈에서 눈물이 고이는 듯 했다.


결혼식은 예정되었던 11시 정각에 시작되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사회자가 마이크를 통해 결혼식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주례를 맡으신 분은 친구의 고등학교 은사님이라는 소개가 있었다. 나는 모르는 분이네. 어, 그러고 보니 친구와 나는 고등학교 동창 사이였던가? 중학교였나?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정답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신랑 입장이라는 사회자의 말에 이어 유난히 턱시도가 잘 어울리는 친구가 들어왔다. 친구는 긴장한 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고 이를 본 하객 중 몇 명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뒤이어 신부 입장이라는 사회자의 말과 함께 아버지의 손을 잡은 친구의 아내가 들어왔다. 신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친구는 장인어른에게 큰 절을 한 후에 신부의 손을 잡았다. 주례 선생님의 주례사가 있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행복하게 살라는 틀에 박힌 주례사였다. 주례사가 있는 동안에 졸고 있는 하객도 보였다. 주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친구가 만세 삼창을 했고, 뒤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리며 친구와 친구의 아내는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행진했다. 그리고 결혼식은 끝이 났다.


나는 축의금을 내면서 받았던 식권을 들고 결혼식장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이제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서 일주일 중에서 오직 일요일에만 느낄 수 있는 평화로운 기분과 함께 휴식을 취할 것이다. 침대에 누워 지난주부터 듣기 시작한 팝송을 들으며 가만히 누워 있는 내 모습을 생각하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은 회색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창문도 활짝 열어 둬야지. 나는 갈비탕에 숟가락을 담그며 미소 지었다.


‘드르르륵’


바지 속의 휴대 전화기가 울렸다. 진동 모드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울렸다는 말보다 떨렸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홍성루씨죠? 아직 결혼식장에 계신가요?”


마침 결혼식장에 하객으로 왔던 사람이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를 찾는 걸 보면 나를 잘 아는 사람이겠지. 오늘 결혼한 친구와 나의 단짝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고등학교 동창 관계였던가? 그에게 물어봐야겠군. 그런데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두드려댔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누구시죠?


나를 찾아온 남자는 자신을 역할 대행 업체의 사장이라고 소개한 후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저도 이 결혼식에 왔다가 조금 전에 바로 옆 결혼식장에도 다녀왔습니다. 오늘이 길일이라서 결혼식이 많이 잡혔더라고요. 역할 대행을 나갈 회원이 부족하게 되서 저도 하객으로 올 수 밖에 없네요. 뭐, 이런 날만 있다면 먹고 살기는 좋겠지만요.”


…….


“먼저 감사하다는 말씀드릴게요. 홍성루씨가 나갔던 곳에서는 항상 고맙다는 전화가 오거든요. 역할 대행인이 아닌 진짜 가족이나 친지, 또는 친구 같았다는 말과 함께요. 지난 목요일에 찾아가신 상가에서는 부조금도 내셨다면서요? 알아보니 오늘도 축의금을 내셨다던데. 자, 이거 받으세요.”


그는 나에게 흰색 봉투를 건넸다.


왜 이러세요? 그건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낸 돈입니다. 나는 그가 내민 봉투를 받지 않은 채 말했다.


“아, 착각을 하셨나보군요. 이건 이번 달 수고비입니다. 내일 은행 계좌로 입금하려고 하다가 마침 같은 곳에 오게 되어서 직접 드리려고 돈을 가져 왔습니다. 인사도 드릴 겸해서요. 홍성루씨는 우리 회사의 특별 회원이시니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 달 수고비요?


“네, 이번 달은 세 건이나 하셨네요. 지난 주 토요일에 김현희씨의 동창회 모임에서 애인 역할 대행, 목요일에는 부친상을 당하신 손대석씨의 상가에서 조문객 역할 대행, 그리고 오늘은 이민수씨의 결혼식에서 하객 역할 대행을 하셨네요. 한 가지 제가 걱정스러운 점은 부조금으로 내신 돈을 제하면 실제로 홍성루씨의 수입이 얼마 되지 않을까하는 것입니다. 뭐, 그래도 부조금은 성루씨가 좋아서 내시는 거라니까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식사 하시던 중에 죄송하네요. 그럼 마저 드세요, 전 가보겠습니다.”


그는 나에게 다시 한 번 악수를 청했다. 악수를 한 후에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뒤돌아서며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서인현씨 되시죠? 아직 결혼식장에 계시죠?”


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간다. 그는 다른 특별 회원을 만나러 가는 듯 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하려던 질문을 차마 하지 못했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 결혼한 친구와 나는 고등학교 동창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우리는 친구가 아니다. 오늘 결혼한 이민수라는 사람은 역할 대행 업체에 의뢰한 고객이고 나는 그의 의뢰 조건에 맞는 역할 대행 업체의 대행인이었다. 무슨 일이든 맡게 되면 완벽하게 하려고 하는 내 성격 탓에 역할 대행 일도 정말 착실히 해왔던 것 같다. 내가 진짜라고 느끼고 몰입했을 만큼. 다른 사람들은 아르바이트 정도로 여기고 하는 일인데 말이다. 그동안 내가 살았던 삶은 진짜가 아닌 거짓 삶일까. 나는 트루먼의 삶을 거짓 삶이라 비웃어왔던 나의 오만함을 비웃듯 큰 소리로 웃으며 갈비탕 그릇에 담긴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식당 안에서 식사를 하던 하객들이 내 웃음소리를 듣고 나를 쳐다보았다. 실성한 사람을 대하는 듯한 그들의 시선. 하지만 그들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그들과 나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니까. 나는 더 큰 소리로 웃고 나서 갈비탕 그릇을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이미 식어버리긴 했지만 아직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국물이라도 마셔서 허전해진 내 마음을 채워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다 나는 갑자기 스친 생각에 깜짝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갈비탕 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우리 부모님이 부모 역할 대행을 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

아니, 반대로 내가 아들 역할 대행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여동생은? 내 직장은?

계약 기간이 길어서 아직 수고비를 주지 않는 것일까?


갈비탕 그릇 안에 있어야 할 갈비와 당면이 국물과 함께 식당 바닥 위를 굴러다닌다. 그리고 갈비탕은 이제 더 이상 갈비탕이라 불리지 못할 것이다.


내 곁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그 어디에도 없다. 나우히어가 아닌 노웨어.
 

- 2005년 12월 13일 조약돌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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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town 바로가기 [2006년 2월 1일]



웹상에 모두 16명의 작가가 모였다. 이름하여 인터넷 소설 월드컵! 지난 6개월간의 예선전을 거쳐 본선에 오른 16명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16강전의 시작!


인터넷 소설 월드컵의 16강전은 대진표 추첨으로 시작되었다. 추첨은 문화관광부 장관이 직접 나와서 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행사의 모든 진행 상황은 온라인으로 중계가 되었다. 상자 속에 담긴 16개의 번호가 각각 새겨진 구슬이 그의 손에 쥐어져 나올 때 마다 작가들과 독자들의 희비가 교차되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를 16강전의 대진 상대로 만난 작가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고, 비교적 쉬워 보이는 상대를 만난 작가의 얼굴에 미소가 약간 비치었다. 이것은 물론 각각의 작가의 컴퓨터에 달린 화상 캠을 통해 중계되는 모습이었다.


대진표 작성이 끝난 후 곧바로 16강전이 시작되었다. 16강전의 진행 방식은 간단했다. 행사 진행 측에서 제시한 16강전의 주제나 제시어에 관련된 글을 써서 웹 페이지에 올리는 것이었다. 작가에게 주어진 시간은 2시간이었다.


[첫사랑]


16강전의 주제가 발표되었다.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주제인 '첫사랑'이였다. 작가들은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16명의 작가의 얼굴을 비추던 중계방송이 꺼졌다. 작가들이 글을 쓰는 2시간 동안은 중계가 되지 않는다는 행사 진행 원칙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작가들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독자들은 웹상에서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독자들은 서로 자신이 지지하는 작가를 응원하는 글을 쓰기도 하고 조심스레 이번 대회에서 우승할 작가를 점쳐 보기도 했다.


어느덧 2시간이 지나고 16명의 작가들이 자신의 개성이 담긴 글을 각각 하나씩 올렸다. 이윽고 각각의 글의 조회 수가 하나씩 올라갔다. 그리고 작가마다 하나씩 부여된 감상 게시판에 글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독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작가들의 표정을 비추는 화상 캠의 화면이 다시 중계되기 시작했다. 어떤 작가는 독자들의 반응 하나 하나에 코멘트를 달아주기도 했다.


이번 대회의 심사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했다. 우선 작가들의 글이 올라온 후 단 2시간 동안 그들의 글이 웹상에 공개된다. 그동안 독자들은 각각의 글을 읽고 반응을 보이며 평점을 매긴다. 여기서 매겨진 점수가 총 점수 중 30%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대학교수와 소설가 등으로 이뤄진 심사 위원단의 심사가 30%를 이루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독자들이 작가들의 글을 읽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2시간동안의 심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40%는 인터넷 소설 작가들이 심사하게 되어 있었다. 16명의 16강 전 진출자는 물론이고 그동안 예심에서 선전하였던 모든 작가들이 심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첫사랑에 관련된 16강전의 글이 공개된 지 2시간이 지났을 때 심사가 마감되었다. 그리고 30분의 휴식이 있은 후 심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렇게 하여 8강 진출자가 선출되었다. 8명 중 돋보이는 글은 로맨스로 다가선 대부분의 글과는 다르게 첫사랑이라는 소재를 공포 장르로 쓴 글이었다. 대부분의 글은 가슴 속에 묻어둔 첫사랑의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릴만한 글이었다. 8강전에 진출한 작가들은 서로 축하하였다. 그리고 아쉽게 탈락한 다른 작가들을 격려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8강전은 하루의 휴식을 취한 후 2월 3일에 치러지기로 발표되었다. 그 기간동안 작가들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며 글을 구상할 수 있을 것이고, 독자들은 심사 후 재공개된 16강전의 모든 글을 다시 읽어 볼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2006년 2월 3일]


8강전의 날이 밝았다. 지난 16강전이 끝난 후 웹상은 온통 처음으로 개최된 인터넷 소설 월드컵에 관련된 기사와 글로 넘쳐났다. 과거나 백일장 같은 것이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치러진다는 색다른 특징은 독자들과 네티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독자들은 물론이고, 작가들도 만족해하는 듯해보였다.


8강전부터는 16강 전 때 결정된 대진표를 그대로 따라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자신과 8강전에서 맞붙을 상대 작가를 미리 파악하여, 상대의 글을 뛰어 넘는 글을 쓸 수 있는 시간까지 주어진 상태였기에 오늘 8강전은 기대가 컸다.


8강전부터는 16강전보다 글에 대한 제한이 조금씩 많아진다. 2시간 동안 주어진 제시어에 관련된 글을 썼던 16강전의 규칙에 분량 제한이라는 규칙이 하나 더 붙었다. 그리고 시간도 1시간 30분으로 줄어들었다.


[8강전 제시어 : 전쟁, 분량 : A4 용지 5~8장, 제한 시간 1시간 30분]


8강전의 제시어가 중계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8강전이 시작되었다. 작가들의 얼굴은 16강 전 때와 마찬가지로 화면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독자들의 열띤 토론이 다시 시작되었다. 독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16강 전 때 자신이 지지하던 작가를 누르고 8강전으로 올라간 작가를 응원하는 글이 있는 반면, 그 작가를 폄하하는 글도 간혹 올라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글은 자신이 응원하는 작가를 지지하는 글이었다. 그리고 8강전부터는 작가가 글을 쓰는 조건과 똑같은 조건으로 독자들에게 임시 공모전의 장을 열었다. 8강전에 진출한 작가와 같은 제시어, 분량, 제한 시간으로 글을 써서 올리는 것이었다. 여기서 호평을 받은 작품을 쓴 독자에게는 인터넷 소설 작가 데뷔의 길을 마련해 주겠다는 배려가 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번외 행사는 인터넷 소설 월드컵의 인기를 더욱 더 불러 일으켰다.

주어진 1시간 30분이 지난 후 8개의 카메라가 각각 켜지며 작가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지난번보다 어려워진 조건에 당황한 듯한 작가의 모습도 보였고, 8강전이 끝났다는 마음에 편해 보이는 표정의 작가도 보였다.


전쟁이라는 제시어를 발전시켜 과거의 전쟁을 실감나게 묘사한 글이 8개의 글 중 세 편이나 있었다. 그리고 한 편은 '한국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나타내었다. '입시 전쟁'이라는 글도 있었고, '음식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미래의 식량난을 묘사한 작품도 있었다. '인터넷 전쟁'이라는 제목과 함께 웹을 통해 치러진 제3차 세계 대전을 그린 글도 있었다. 나머지 한 작품은 8강 포기 선언과 함께 등록되지 않았다. 세계 최초의 웹으로 치러지는 인터넷 소설 월드컵에서 포기 선언이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상대방 작가는 초유의 부전승으로 4강전에 진출할 상황이 된 것이었다. 심사 위원들은 즉각 심사와 함께 회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2시간 동안 공개되는 8강 전 작품을 토대로 한 독자, 심사위원, 인터넷 소설 작가들의 심사가 시작되었다.


2시간이 지난 후, 부전승에 대한 공식 입장이 발표되었다. 부전승은 인정할 수 없으며 해당 작가의 글이 심사 기준을 넘어서면 4강으로 진출한다는 것이었다. 이 결정은 심사위원들의 생각은 물론이고, 독자와 작가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설명과 인터넷 소설의 발전을 위한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리고 4강 전 진출 작가가 발표되었다. '인터넷 전쟁'이라는 글이 현재의 시대를 잘 나타내었다는 평과 함께 4강에 먼저 진출하였다. 그리고 '입시 전쟁'이 제시어를 2차 해석하여 잘 표현하였다는 평과 함께 4강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리고 문제의 부전승 조건을 얻은 작가는 전쟁의 비극성과 잔혹성을 A4 용지 단 6장에 불과한 분량에 잘 묘사하였다는 평과 함께 부전승이 아닌 실력으로 4강에 진출하였다. 이것이 4강전에 진출한 작가 명단의 전부였다. 단 3명이 전부였던 것이다. 나머지 작가 중에서 4강전에 진출할 만한 글이 없다는 설명과 함께, 이것은 부전승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와 마찬 가지로, 실력이 없으면 상위의 토너먼트로 진출할 수 없다는 주최 측의 의도였다. 4강전은 이틀의 휴식을 취한 후 치러지기로 발표가 나며 인터넷 소설 월드컵의 8강전은 끝이 났다.



[2006년 2월 4일]


인터넷 소설 월드컵의 웹 페이지가 떠들썩했다. 4강에서 단 3명의 작가가 실력을 겨루게 된 것이 큰 화제였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어느 네티즌이 내놓은 것이 토론의 대상이었다. 어제 치러진 8강전의 번외 행사에서 우승한 독자를 4강전에 진출시키자는 것이었다. 한 네티즌의 의견이 커다란 파도를 몰고 왔다. 단 한 편의 글로 인터넷 소설 월드컵의 4강전까지 진출시키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랬다. 4강에 진출한 작가들은 지난 6개월간의 예선을 거쳤고, 16강과 8강을 헤쳐 왔다.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드세었다. 인터넷 소설 발전을 운운하면서 실력 있는 작가를 4강전의 공석에 참여시키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었다. 양쪽의 의견이 팽팽히 대립되자 주최 측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인터넷 소설 월드컵에 참가했던 작가들의 의향을 물었다. 그리고 어려운 결정이 내려졌다. 번외 경기에서 우승한 작가에게 4강전의 참가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4강전을 하루 연기 한다는 것이었다. 번외 경기 우승 작가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라는 부연 설명이 뒤따랐다.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여전했지만 더욱 흥미진진해진 4강전에 대한 기대는 반대 의견을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했다.



[2006년 2월 7일]


세간의 이목을 집중 시켜왔던 인터넷 소설 월드컵의 4강전이 시작되었다. 8강전에서 올라온 3명의 작가와 번외 경기에서 우승한 작가 1명이 자웅을 겨룰 날이 다가온 것이었다. 이 행사는 해외토픽을 통해 해외 유명 언론에도 알려진 후라 오늘 경기는 인터넷을 통해 해외 유명 사이트에 동시통역되어 중계되고 있었다. 오늘의 4강전은 지난 8강전에 또 하나의 제한 조건이 붙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장르의 제한이었다. 장르의 제한은 어떤 장르의 글도 소화해 낼 수 있는  작가를 뽑아내기 위한 조치였다. 오늘 4강전의 장르는 공정을 기하기 위해 당일 추첨으로 발표되게 되어 있었다. 먼저 제시어와 글의 분량, 제한 시간이 발표되었다.


[4강 전 제시어 : 없음 , 분량 : A4 용지 9~12장, 제한 시간 2시간]


분량이 늘어난 만큼 제한 시간이 8강전보다 30분 늘어났다는 설명만 있을 뿐 기타의 부가적인 설명은 없었다. 작가들은 물론이고, 독자들은 놀라는 눈치였다. 제시어가 없다니…….


그리고 곧이어 장르의 추첨이 이루어졌다. 상자에서 뽑혀진 구슬에 쓰인 장르는 '판타지'였다.


장르 발표가 끝나고 4명의 작가들의 얼굴이 화면에서 사라지면서 4강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오늘은 번외 경기가 없었다. 하지만 독자들은 웹상에 모여 끝말잇기 등의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채팅 방에 모여 잡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지난 예선전의 글과, 16강, 8강전의 글의 모두 공개된 게시판에서 글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독자도 많았다. 그리고 번외 경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4강전의 작가들처럼 글을 써서 게시판에 올리는 네티즌도 간혹 있었다.


2시간이 지난 후, 4편의 4강 전 작품이 공개되었다. 제시어가 없기에 자유 주제로 쓴 작가가 2명이었고, '없음'을 제시어로 해석하여 '없음'을 소재로 하여 쓴 작가가 2명이었다. 자유 주제로 쓴 글도 훌륭했고, 없음을 소재로 한 글도 뛰어났다. 이번 4강전은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작품의 심사 시간이 3시간이었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제시어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늘어난 분량 때문이기도 했다. 심사위원들과 작가들의 얼굴이 간혹 화면에 비쳤다. 그들은 매우 만족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독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4편 모두가 훌륭한 글이라서 어느 한 글을 뽑기 힘들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인터넷 소설 월드컵의 결승전은 단 2명의 작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결과가 발표되었다. '없음'을 주제로 모든 인간이 어느 날 사라진 내용의 글이 자유 주제로 미래의 사회상을 그린 판타지 글을 누르고 결승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8강전 글인 '인터넷 전쟁'을 발전시켜 '인터넷 전쟁이 끝난 후'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이 모든 존재를 부정한 '있는 것은 없다.'라는 글을 물리치고 결승에 올랐다.



[2006년 2월 10일]


인터넷 소설 월드컵 결승전의 막이 올랐다. 결승전에 임하기에 앞서 결승전에 올라온 작가의 소개가 있었다. 예선 전 때 16위의 성적으로 16강전에 진출하여 수많은 작가들을 물리치고 '인터넷 전쟁', '인터넷 전쟁이 끝난 후' 등의 글로 결승에 진출한 작가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특히 '인터넷 전쟁'이 있은 후 이어진 모든 인터넷 라인이 파괴된 사회를 묘사한 '인터넷 전쟁이 끝난 후'에 대한 극찬이 이었다. 그리고 이에 맞설 다른 작가는 바로 문제의 그였다. 8강 전 번외 경기에서 우승하여 4강전에 오른 후 '없음'을 주제로 인간이 모두 사라진 후의 세상을 묘사한 글을 쓴 작가였다. 그 글에서 그는 인간이 사라진 후의 세상을 묘사하고 있는 작가 자신이 알고 보니 인간을 모두 없애버린 장본인이었다는, 약간은 섬뜩한 내용의 글로 결승에 올랐다.


작가의 소개가 끝난 후 결승전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여기서 우승한 작가에게는 '넷북(Net Book)'의 발간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넷북'이란 최근 몇 년간 인터넷 소설이 종이에 새겨져 출판되는 것에 반대하여 생긴 인터넷상의 책이라는 것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글이 책으로 나온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어 만족하고, 독자는 인터넷 소설을 인터넷에서 무료로 볼 수 있어 인터넷 소설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만족하는 것이 바로 '넷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승전의 조건이 발표되었다.


[제시어 : 인터넷 소설, 분량 : 제한 없음, 제한 시간 없음, 장르 : 제한 없음]


4강전의 제시어가 '없음'이었던 것보다 더욱 충격적이었다. 제시어만이 주어졌을 뿐 모든 것의 제한이 없었다. 네티즌들은 분량과 제한 시간이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제한 시간마저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여기에 이번 행사의 기획자가 설명을 하였다. 인터넷 소설은 자유로운 소설이기에 결승전은 작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었다는 내용과 제시어도 없애려고 했으나 그렇게 했을 경우에 예전에 써놓았던 글을 제출할 수도 있어서 제시어는 주었다는 내용이 주된 설명이었다. 그리고 2명의 작가가 자신이 쓴 글에 만족하였을 때 작품을 제출하면 되고, 2명 모두가 작품을 제출하였을 때 작품이 공개되고 심사가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기획자의 설명이 끝나자 대망의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결승전 진출 작가 2명의 화상이 중계화면에서 사라졌다. 모든 사람들이 언제쯤 작품이 올라올까 하고 숨을 죽여 기다리는 것 같았다.


7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결승전의 심사가 시작된다는 공지가 떴다. 오랜 시간 기다렸던 사람들은 모두 기대감에 들떠 결승전 작품을 읽었다. 그리고 심사가 마감되고, 결과 발표를 앞두고 있었다. 결과 발표에 앞서 심사평이 나왔다. 결승전의 심사평은 특이했다. 인터넷의 채팅창이 뜨고 2개의 ID가 등장했다.


심사위원 : 지금부터 인터넷 소설 월드컵 결승전 심사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그에 앞서 심사평을 하겠습니다.


독자 : 2개의 작품이 올라 온 시간을 공개할 수 있나요?


심사위원 : 네, 물론입니다. 한 작품은 결승전이 시작된 후 1시간 후에 올라왔고, 다른 작품은 7시간 후에 올라왔습니다.


독자 : 심사에 이러한 시간이 영향을 미쳤나요?


심사위원 : 아닙니다. 심사에는 작품이 등록된 시간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실 것입니다. 인터넷상에서 소설의 연재가 올라오길 기다리는 독자의 마음이죠. 그런 기분 다들 느껴보셨죠?


독자 : 그럼 심사평을 해 주시죠.


심사위원 : 네. 먼저 '내가 만일'이라는 글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글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제일 처음 떠올랐던 생각은 '내가 무엇이 된다면 이렇게 하겠다.'라는 내용인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만일'은 내가 단 10,000일만 살게 된다면 이라는 가정 하에 시작되는 내용이었습니다. 만 일, 즉 '27살에 인생을 마감하게 될 때 행복할 수 있으려면'이라는 가정 하에 시작된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죠. 가슴이 따뜻해지고, 여운이 많은 내용이었습니다. 아름답게 최후를 맞이하는 주인공이 심정이 너무나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독자 : 그리고 다른 작품은요?


심사위원 : '인터넷 소설 월드컵'라는 글이죠. 인터넷 소설 월드컵에 참가하는 내용이 참 특이했어요. 인터넷 소설의 미래를 보여줬다고나 할까요? '백일장이 인터넷으로 치러진다면?'이라는 가정에 현재 부흥 중인 인터넷 소설을 접목시킨 아이디어가 너무나 좋았어요.  


독자 : 네. 그랬군요. 그럼 오늘의 우승작을 발표해 주세요.


심사위원 : 우승작은…….



나는 잠에서 깨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마우스의 커서가 화면에서 깜빡인다. 그리고 나는 키보드를 두드려 '인터넷 소설 월드컵'이라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 연재를 기다리는 독자들을 위해. 그리고 언젠가는 이러한 날이 올만큼 내가 몸담은 인터넷 소설이 발전하길 바라며…….


- 2004년 2월 2일 조약돌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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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두운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고요함을 참지 못하는 듯한 어색한 기침 소리가 한 번 뱉어져 나왔지만 어둠 속이었기에 약한 인내심의 소유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물론 기침 소리의 당사자를 제외한다면.


“지금 들어온대, 모두 준비해.”


귀에 꽂힌 무전기를 통해 전해진 정보를 모두에게 알리던 선호가 성냥을 그었다. 어둠을 쫓아낸 성냥의 불씨는 이내 케이크에 꽂힌 하나의 초에 옮겨졌다. 주어진 임무를 끝낸 성냥불을 입으로 불어 끄는 선호의 얼굴에 비장감이 흐르는 듯 보였다. 케이크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사람은 선호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었고 모두가 조용히 케이크와 닫힌 문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촛불이 부끄러워할 정도의 밝은 빛과 함께 한 소녀가 나타났다. 작은 키에 긴 생머리의 소녀는 앳된 모습이었다.


“어머.”


소녀는 놀란 듯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소녀의 눈동자가 초가 녹아들어가는 케이크에 고정되려던 찰나 선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여진아, 초 다 녹겠다. 어서 들어와.”


선호의 말과 동시에 여진이라 불린 소녀의 뒤에서 한 청년이 여진의 등을 떠밀며 문을 닫았다. 손에 무전기가 들린 것으로 보아 이전에 선호에게 무전을 날린 주인공인 듯 했다. 여진과 무전기 청년이 방에 들어서자 문이 닫혔고, 빛이 사라진 방안에서 촛불은 다시 의기양양한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자, 하나, 둘, 셋.”


선호의 신호와 동시에 조용했던 방안이 노랫소리로 가득 찼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여진이의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가 끝나고 박수가 끝날 때까지 여진은 멍한 표정으로 케이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밝은 표정으로 기쁨을 표현하던 수현이 여진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뭐해, 초 다 녹겠다. 입으로 ‘후’하고 촛불을 끄면서 소원을 빌면 돼.”


여진은 수현의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이내 입으로 촛불을 불었다. 다시 찾아온 어둠 속에서 선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이게 정확히 맞는지는 모르겠다. 이 노래의 박자가 맞는지, 음정이 맞는지. 원래 케이크에는 그 사람의 나이만큼 초를 꽂았대. 그리고 촛불을 끄면서 소원을 빌고. 소원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아야 이루어진다더라. 이게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전부야.”


선호의 말이 끝나고 창문을 가렸던 커튼이 걷히자 방을 가득 채웠던 어둠이 쫓겨났다. 가만히 케이크만을 바라보던 여진이 이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방안을 채우던 침묵이 잠시 자신의 자리를 울음소리에 내주고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맷자락으로 훔치며 수현이 말했다.


“여진아, 무사히 다녀와야 해. 알겠지? 가장 어린 널 사지로 몰아넣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 흑흑흑.”


이내 울먹이는 수현을 여진이 감싸 안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내가 자원한 일인데. 선호 오빠, 원래 생일을 맞은 사람의 나이만큼 초를 꽂았다고 했잖아. 근데 오늘 초를 하나 꽂은 건 내가 오늘 새로 태어났다는 의미 맞지?”


“그래, 맞아. 요 녀석, 어리게만 봤더니 오라버니의 깊은 뜻까지 헤아릴 줄 아는구먼. 허허.”


선호의 웃음소리와 함께 모두가 눈물을 닦으며 웃고 있었다. 울음소리에 자리를 내주었던 침묵은 여진의 웃음소리와 환한 미소를 보며 자신의 자리를 영원히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방안을 가득 채운 웃음소리와 함께 100년만의 생일 축하 자리는 계속되었다.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된다는 100년 전의 이야기를 그들은 알지 못했다.



2.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그러니까 서기 2057년 1월 1일의 일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해가 빨리 뜬다는 이름에 걸맞게 울산의 간절곶은 새해를 맞이하여 해돋이를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추운 겨울 날씨에 저항하기 위해 두꺼운 옷과 장갑, 목도리로 중무장을 했지만 겨울 바다 바람은 살을 에는 듯 차가웠다. 새해의 첫 태양이 뜨는 장관을 기대하며 추위를 견디던 사람들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만한 평생 잊지 못할 장관을 보게 되었다. 수평선상에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한 해가 뜨는 광경이 연출되자 간절곶에 직접 나와 있는 사람들과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떠오른 태양과 함께 눈앞을 가득 채운 장면에 그들의 탄성은 이내 괴성이 되었다. 태양의 주변에서 어른거리는 검은 점들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태양의 흑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검은 점은 점점 커지며 사람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야에 확연하게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태양의 흑점이 아닌 우주선이었다. 우주선은 간절곶에 모인 사람들을 공격했다. 우주선에서 쏘는 레이저 광선 빔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간절곶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쓰레기더미 태우듯 태워버리고 간절곶이라는 지역을 지도에서 지워버린 우주선의 무자비한 공격 장면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졌고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영화 속에서만 보아왔던 화성 침공의 시작이었다. 전 세계는 경악했고, 주가는 폭락하고 유가는 치솟았다. 사람들은 벌벌 떨며 문을 걸어 잠그고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공포 영화의 주인공이 귀신을 피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떠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영화에서 보아온 화성인과 우주선의 공격에 맞설 초인 영웅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전 세계의 모든 전파가 하나씩 멈추기 시작했다. 화성인의 소행으로 생각되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모두가 집 안에 숨어 죽은 듯이 지냈다. 밤이 되어도 혹시나 빛을 보고 화성인이 쳐들어올까 두려워하여 전등은커녕 촛불 하나 켜지 못했다. 그렇게 암흑 같은 시간은 흘러갔다.


그로부터 석 달의 시간이 흘렀다. 정지되었던 세계의 모든 전파가 하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을 통해 가슴을 쓸어내릴만한 소식을 들었다. 아시아를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을 공격했던 화성인의 우주선 함대가 지구 방위군에 의해 무력화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지구 방위군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랬고, 지구 방위군이 화성인을 물리친 방법 또한 영화 같았다. 화성인의 무자비한 공격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지구 방위군이 화성인을 물리친 방법은 60여 년 전 팀 버튼이 만든 영화 <화성 침공>에서 화성인을 물리칠 때 사용한, 올드 팝송의 선율과 파장을 이용하여 화성인의 몸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방법이야 어찌 되었건 이제는 살았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환호했고, 영화 <화성 침공>을 통해 미래의 후손들이 살아남을 방법을 알려준 팀 버튼은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대한민국의 간절곶이 있었던 곳을 시작으로 전 세계 곳곳에 팀 버튼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리고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평화가 찾아왔다.



3.


화성인의 우주선 공격에 대한 공포가 어느 정도 사라져가고 있던 2060년, 대한민국에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 생겨났다. 일명 태양당(太陽黨, The Solar Party)과 태음당(太陰黨, The Lunar Party)이라는 두 정당이 정치 세력의 양대 산맥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것은 비단 대한민국만의 정치 패러다임이 아니었다. 정당의 이름만 조금씩 다를 뿐 전 세계의 정치를 이끄는 세력은 대한민국과 대동소이했다. 전 세계적으로 통합되어가는 듯한 정치 세력의 출현은 진일보한 정치의 발전이라는 평도 있었지만, 두 정당이 내세운 정치 이념은 원시 부족 사회의 그것과 비슷했다. 태양을 숭배하는 태양당은 생일을 양력으로 기념하는 이들을 주축 세력으로 삼고 있었고, 이와 반대로 달을 숭배하는 태음당은 생일을 음력으로 기념하는 이들이 주축 세력이었다. 과거부터 양력과 음력의 개념이 잘 잡혀 있는 대한민국과 아시아 국가들은 그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다른 대륙의 국가들은 자신들만의 양력과 음력 개념을 설정하여 적용시켰다. 예를 들면 해가 떠 있을 때 태어난 사람의 생일을 양력으로, 해가 진 이후에 태어난 사람의 생일을 음력으로 규정한 프랑스나 봄과 여름에 태어난 사람의 생일을 양력으로, 가을과 겨울에 태어난 사람의 생일을 음력으로 규정한 호주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태양당과 태음당으로 나누어진 정치 세력은 전대미문의 우스운 정책을 내놓는데 합의했다. 그것은 바로 생일과 관련된 모든 행위의 금지를 규정한 ‘생일 규제 법안’이었다. 이 법안에 따르면 생일과 관련된 모든 언어와 행동을 정치적 행동으로 규정하였다. 물론 이를 어길 시에는 정치 사범 내지는 사상범으로 몰려 강력한 처벌이 뒤따라오도록 되어 있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이 언제에요?”, “생일이 양력인가요? 음력인가요?” 등의 말을 포함하여 생일 축하 노래, 생일 파티, 생일 케이크 등이 대표적인 규제 대상의 예였다. ‘생일 규제 법안’을 우습게 여기고 그동안의 관습대로 생일 파티를 열었던 사람들이 줄줄이 구속되어 처벌받는 모습이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보도되자 많은 사람들이 ‘생일 규제 법안’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였다. 경찰에 의해 연행된 반대 운동의 주도 세력이 무기 징역을 선고받고, 반대 운동 집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실형이 선고되었다. 사람들은 지구상의 민주주의가 사라졌다는 말과 함께 차라리 화성인의 지배를 받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말마저 내뱉게 되었다. 하지만 ‘생일 규제 법안’을 제외하고는 태양당과 태음당은 그동안 정당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모범적이며 생산적인 정치를 해보였고 세계의 정국은 안정화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생일 축하 풍습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4.


이른 아침 출근 시간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가운데 한 소녀가 서 있다. 회색의 빌딩 숲 속에서 아무런 대화 없이 자신만의 일상을 쫓기에 바쁜 사람들에게 소녀의 존재는 무의미했다. 펑펑 울다가 온 것인지 두 눈이 퉁퉁 부은 소녀는 바닥에 놓인 상자에서 조심스레 케이크를 꺼냈다. 그리고 가방에서 작은 초를 꺼내어 케이크에 꽂았다. 소녀가 꽂은 초는 정확히 100개였다. 소녀가 100개의 초를 하나씩 케이크에 꽂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소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소녀는 라이터를 꺼내어 100개의 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케이크를 두 손에 들어 가슴 높이까지 끌어 올린 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여진이의 생일 축하합니다.”


지나가던 사람 중 몇몇이 걸음을 멈추고 신기한 광경을 쳐다보았다. 여진은 조금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조금은 서툴지만 선호와 수현 등이 불러주었던 그 노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자 여진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여진이의 생일 축하합니다.”


여진의 노래가 계속되면서 이를 신기하게 여긴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 둘 여진에게 고정되었다. 여진은 용기를 얻은 듯 더욱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10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온 생일 축하 노래는 사람들의 귀를 자극했고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멀리 숨어서 여진을 지켜보던 선호 일행도 작은 목소리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여진을 응원했다. 이들의 노래는 어린 여진을 사지로 보내고 자신들은 숨어있는 상황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임과 동시에 자기 위안이기도 하였다. 여진의 노래는 케이크에 꽂힌 100개의 초가 완전히 녹아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진의 주변을 빙 둘러싼 사람들은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여진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여진의 생일 축하 시위는 그렇게 끝이 났다.



5.


정치 사범으로 분류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여진에 대한 처리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여진의 생일 축하 시위 장면이 그 당시 주변에서 구경하던 한 사람의 휴대 전화에 녹화된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휴대 전화 등의 소형 휴대 기기를 이용한 무선 인프라가 정보 공유의 주요 수단으로 여겨질 만큼 무선 인프라가 잘 구축된 현재에 여진의 생일 축하 시위 장면이 전 세계로 퍼지는 것은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선호와 수현을 중심으로 기획되고 여진이 실천에 옮긴 생일 축하 시위가 노리는 효과이기도 했다. 새로우면서도 더 자극적인 것을 찾는 현대인들에게 100년 동안 통제되어온 생일 축하 노래와 생일 케이크는 커다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여진의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중앙 보안국의 한순열은 최근 며칠 사이에 부쩍 주름살이 늘어난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30대에 국가 정보기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 보안국의 국장이 된 능력을 가진 한순열이 그동안 맡아서 처리해온 일에 비하자면 여진을 처리하는 일은 쉬우면서도 동시에 어려운 일이었다. 여진이라는 개인을 처리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생일 축하를 금지한 생일 규제 법안을 위반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여 정부를 전복시키려 시도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받도록 유도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진의 생일 축하 시위 장면을 본 사람 수가 세계 인구 150억 명 중 10분의 1인 15억 명은 넘을 거라는 중앙 보안국의 통계가 그의 고민을 말해주고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한순열이 내놓은 여진의 처리 방안은 놀라울 정도가 아니라 섬뜩하기까지 했다.


“오늘 ‘생일 규제 법안’을 위반한 이여진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왔습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피고 이여진은 지난 100년 간 화성인의 풍습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던 행위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해보였다. 그리고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지 못한 대중을 선동할 우려가 있어 사형을 처한다. 사형 집행은 판결이 내려진 후 10일 이내에 우주로 추방하는 것으로 정한다.’며 이여진의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사건은 이로써 마무리를 짓게 되었습니다. 대법원에서 KVS 뉴스 신동우입니다.”


이여진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에 쏠렸던 사람들의 관심은 이제 우주로 추방될 한 소녀의 운명으로 옮아갔다. 판결이 내려진 후 10일 이내에 집행될 우주 추방의 정확한 날짜와 그 방법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다. 우주 왕복선을 이용하여 지구와 인접한 다른 행성의 수용소에 보내질 것이라는 추측이 가장 설득력을 얻었는데, 수용소로 보내는 것은 사형 집행이 아니라는 반론이 나오자 그 설득력은 점점 힘을 잃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나온 추측이 여진을 캡슐에 넣어 우주로 날려버린다는 내용이었는데, 캡슐을 이용한 추방 방법이 우주 왕복선을 이용하는 방법보다 좀 더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을 때 사람들을 충격에 떨게 만든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금지된 화성인의 풍습을 재현한 이여진에 대한 사형 선고가 내린 가운데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의 우주 생물학과에서 놀라온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체포 당시 채취된 이여진의 혈액을 정밀 분석한 결과, 지구인의 혈액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성분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성분은 100년 전에 지구를 침범하였던 화성인의 혈액 성분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의 조사 결과 발표가 이어지자 정부는 화성인 이여진의 사형 집행을 서둘러 실시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에서 KVS 뉴스 신동우입니다.”


텔레비전 화면을 보던 여진은 가만히 한순열을 바라보았다.


“날 화성인으로 둔갑시켰군요.”


“그게 가장 간단하거든. 너희들의 똑똑한 계획에 따라 전 세계로 퍼져나간 생일 축하 장면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공포심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이야. 사람들은 아직도 100년 전 지구를 침공한 화성인에 대해 무의식중에 공포심을 지니고 있거든. 놀라울 정도로 발달한 우주 과학 기술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숙원이었던 우주 관광 사업이 시작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그 거부감 때문이니까. 하하.”


“너희라니 무슨 말이죠?”


비열한 웃음을 짓는 한순열에게 경멸에 찬 시선을 보내던 여진은 갑자기 머리를 스친 생각에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


“내 말에 눈치를 챘나보군. 그래, 내가 네가 아닌 너희라고 했지. 이미 너희 조직에 대한 정보 입수는 물론 신상 파악까지 끝난 상태지. 이선호, 한수현, 그리고 졸개들. 네가 사랑하는 언니, 오빠들도 조만간 널 따라 갈 테니 걱정 말라고.”


여진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체포된 이후 힘든 상황에서도 줄곧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다.



6.


“100년간 금지되었던 풍습으로 지구인을 포섭하여 지구를 또 다시 위험에 빠뜨리고자 했던 화성인의 최후가 결정되는 날입니다. 이곳 전남 고흥 나로도 우주센터에는 화성인 이여진을 화성으로 돌려보낼 우주 왕복선이 발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사형이 선고된 화성인을 화성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지구인들은 100년 전 화성인의 만행을 폭력이 아닌 평화적이고 인도적인 방법으로 되돌려주는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나로도 우주센터에서 KVS 뉴스 신동우입니다.”


여진은 완전무장을 한 특수 부대원들의 감시 하에 우주 왕복선 안으로 호송되었다. 특수 부대원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검은 복면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선글라스도 끼고 있었는데 이는 화성인과 눈을 맞추었을 때 일어날지 모를 최면과 같은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진은 특수 부대원들의 손에 들린 소총의 위압감보다는 지구에서 추방된다는 사실이 가져다준 공포에 몸을 떨었다.


“괜찮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너는 새로운 곳에서 살 수 있을 거니까. 그래도 교수대에 목이 대롱대롱 걸려 죽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나?”


여진의 호송 업무를 책임지고 우주 왕복선에 오른 한순열이 의자에 묶인 채로 앉아 떨고 있는 그녀를 보고 조롱하듯 말했다. 여진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발사 준비를 마친 우주 왕복선은 서서히 지구를 떠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지구의 중력 범위에서 벗어났다.


“잘 보아라, 이젠 지구에 돌아올 일이 없을 테니…….”


지구의 대기권을 벗어나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한순열이 여진의 몸에 묶인 특수 밧줄을 풀어주며 우주 왕복선의 창을 가리켰다. 여진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몸을 움직여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주 왕복선 밖으로 하나의 행성이 보였다. 점점 멀어지는 하나의 행성. 그것은 푸른빛의 지구가 아닌 붉은빛의 지구였다. 여진은 놀라서 당황한 표정으로 한순열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럴 수가. 지구는 원래 푸른빛 아닌가요? 창 밖에 보이는 행성은 붉은빛인데…….”


“…….”


한순열은 대답 대신 여진에게 책 한 권을 건넸다. 조금은 지저분한 느낌이 드는 검은 표지의 두꺼운 책이었다. 여진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 사실에 대한 대답이 책 속에 있을 거라 확신하며 책을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조심스레 책장을 넘겼다.



7.


<묵시록>


지구력 2057년 1월 1일, 한 무리의 지구인을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지구를 식민지 행성으로 만들기 위한 절차가 시작되었다. 우리의 예상대로 지구인의 무력 저항은 격렬했으나 우리의 첨단 과학 기술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저항하는 지구인은 차례차례 사살했고, 저항 의지를 가지지 않는 지구인은 살려두었다. 그들의 생식력을 통해 멸종해가는 화성인을 되살리고, 그들의 노동력을 통해 식민지 지구 건설과 화성의 재건을 이루어야하기에 그들은 소중한 자원으로 분류하여 관리하기로 하였다.


지구력 2057년 2월 9일, 일주일 전 마지막 무력 저항을 끝으로 지구인의 공격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소중한 자원으로 분류된 지구인을 찾아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곳곳에 숨어 있던 많은 지구인을 포획하였다.


지구력 2057년 2월 14일, 갑자기 들려온 폭발음의 정체는 핵폭발로 밝혀졌다. 지하에 숨어 있던 지구 방위군의 최후 세력이 핵을 터뜨린 것으로 보인다. 지구 최후의 무기라는 핵은 지구의 생태계를 오염시켰다. 이에 우리는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지구를 식민지 행성으로 건설하여 화성인을 멸종에서 구하는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지구력 2057년 3월 7일, 지구에서 포획해온 지구인들을 세뇌시키는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들에게 이곳은 화성이 아닌 지구이며, 지구를 침공했던 화성인은 지구 방위군의 우스꽝스러운 공격으로 저지되었다는 기억을 집어넣었다. 우리의 수정된 계획에 따라 세뇌당한 지구인은 이곳에서 지구인의 삶을 살며, 이곳을 지구와 같은 환경으로 바꾸어 줄 것이다. 하지만 지구를 식민 행성으로 만들기 위한 우리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구인의 엄청난 생식력을 미루어볼 때 이곳 화성도 조만간 포화상태에 이를 것이라 예상된다.


지구력 2060년 7월 19일, 지구인 중 몇몇이 이곳 환경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시 세뇌를 시켰지만 혹시나 다시 발생할지 모를 사태에 대비하는 방법이 고안되어 실행되었다. 그것은 지구인들이 서로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방법으로 그들이 즐겼다는 생일 축하 풍습을 없애는 정치 제도를 도입하였다.


지구력 2079년 3월 19일, 순수한 지구인 혈통은 이제 없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지구인들은 화성인들과 교미를 하여 지구인과 화성인의 장점을 결합시킨 후손을 만들어냈다. 순수 혈통의 지구인들은 이곳의 대기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오래 살지 못했다. 그들의 호흡 기관을 바꾸기 위해 투입되었던 약품은 성공작이 아닌 것 같다.


지구력 2156년 12월 24일, 금지하였던 생일 축하 풍습을 사람들 앞에서 해보인 소녀를 체포하였다. 놀라운 사실은 소녀는 지구인의 피가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순수 화성인 계열이라는 것이다. 소녀의 행동 동기는 더 조사해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구력 2157년 1월 1일, 지구 식민지 건설 계획 시행의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핵으로 오염된 후 약 1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구의 환경에 대한 조사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꾸준한 정화 작업을 펼쳤지만 아직까지 단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가 발견되지 않은 그곳에 대한 실제적인 생체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실험은 순수 화성인 계통의 여자를 시작으로 순수 화성인 계통의 남자와 지구인과 화성인의 혼혈 계통 남녀를 대상으로 한다.



8.


<묵시록>을 넘기던 여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책의 두께와는 달리 여진이 읽을 수 있는 내용은 채 20쪽 분량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분량은 아직 공백 상태로 남아 있었다. 여진은 충격으로 인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살던 곳이 지구가 아닌 화성이었다는 것보다 자신이 화성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화성인인 내가 왜 지구의 잊혀진 풍습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일까? 누군가의 음모에 빠진 걸까? 여러 가지 생각에 빠진 여진을 향해 한순열이 입을 열었다.


“그 책은 원래 아무도 읽지 못하게 되어있는 책이지, 여기 우주 왕복선에 보관되어 왔으니까. 묵시록을 읽은 사람은 아마 네가 처음일거야. 지구에 가서 우리들의 꿈이 실현되도록 노력해주길 바라는 내 선물이랄까. 우리별은 이제 포화 상태에 이르렀어. 빨리 식민 행성을 건설하지 못하면 인구 포화로 인한 자원 부족 때문에 전쟁이나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군. 그럼 부탁하네.”


지금의 한순열의 태도는 여진을 조롱한다기보다는 정말로 공손히 부탁하는 것 같아보였다. 우주 왕복선이 지구에 인접했을 때 여진은 특수 부대와 순열의 비장한 배웅을 받으며 소형 캡슐로 옮겨 탔다. 지구로 향하는 캡슐의 창 밖을 바라본 여진의 눈에 푸른빛 지구가 들어왔다. 폐허가 된 지구를 향한 화성인의 두 번째 침공의 시작이었다.


- 2007년 1월 1일 조약돌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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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상처 입은 그댄

깨진 유리 조각

조금만 다가서도 찔리는

깨진 유리 조각



유리 조각 그대여

내 가슴에 안겨요

깨진 유리 조각에

내 가슴 피 흘려도

내 마음은 기쁠 테니



그대만 허락한다면

그대의 상처

내 가슴 피로

따뜻하게 감싸 줄게요




유리 조각 그대 - 1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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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봄 햇살에

동래 파전 안주 삼아 마시는 것이

막걸리의 참맛



무더운 여름날

땀 뻘뻘 흘리며 먹는 것이

삼계탕의 참맛



시원한 가을바람

미나리 양파 오이 매콤하게 버무려 먹는 것이

전어의 참맛



코끝 시린 겨울날

손 꽁꽁 발 꽁꽁 입 꽁꽁 먹는 것이

아이스크림의 참맛



아무리 맛보고 맛보아도

도저히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또 맛보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참맛




유리 조각 그대 - 1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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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함께 했던

우리의 추억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그대를 기다리는

나의 그리움

한 장의 글로 남는다



먼 훗날 그대

한 장의 추억 속

나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으면…….





유리 조각 그대 - 1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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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올해로 40세가 된, 중학교 1학년인 아들과 초등학교 4학년인 딸을 두고 있는 평범한 가장이다. 물론 나에게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내도 있다. 말 그대로 토끼 같은 자식들과 여우같은 마누라를 둔 남자다.


나는 1년 전만 해도 XX물산의 사장이었다. 큰 회사는 아니었지만 부채 없는 건실한 회사라 남들의 부러움을 사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직장이 없다. 1년 전쯤에 나에게 닥친 불행 때문이다. 거래처인 OO통상과의 업무를 위해 대전으로 차를 몰고 가던 중에 중앙선을 침범한 대형 트레일러와 정면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7개월인가 8개월 동안 병원 침대 신세를 져야했다.


그리고 몇 달 전에 여기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나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해서였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은 OO아파트이고, 나는 502호에 살고 있다. 7층짜리 건물인 이 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의 집안 구조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벽의 재질도 각각 다르다. 입주하는 사람 측에서 마음에 드는, 가장 편안한 것으로 고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살고 있는 방은 값비싼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수십 년이 지나도 휘어지거나 변하지 않는 나무란다. 내 아내가 나를 위해 특별히 골라준 것이다.


아내와 자식들은 나와 함께 살지 않는다. 내가 사고를 당한 후 아내는 병원비를 대기 위해 멀리 타지에서 일을 해야 했다. 나의 회사를 팔아서 마련한 돈도 어느새 다 떨어져서 우리의 보금자리였던 작은 집도 팔았다. 하지만 그 돈도 더 이상 남지 않았다고 아내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내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지만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아이들은 전학을 가야했지만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아빠가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라고 항상 말하던 딸아이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아이들은 '아빠, 사랑해요.' 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나를 찾아왔다. 내가 외로워할까 봐 그런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내는 항상 하이얀 백합꽃을 한 아름 가지고 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꽃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리고 친구들과 찍은 사진, 외할머니와 찍은 사진 등 많은 사진을 가져와서 나에게 남겨 주고 돌아갔다. 가끔씩은 나와 함께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이었지만 나는 가족들과의 다음 만남을 기다리며 한 달을 버틸 수 있었다.



2.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다음 날이 아내와 아이들이 나를 찾아오기로 한 날이라 나는 들떠 있었다. 지난 번 아이들이 주고 간 사진을 보며 한참 기분 좋게 웃고 있을 때였다. 나의 이웃집인 503호가 떠들썩했다. 어제까지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는데 누군가 이사를 오나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부부인 듯한 젊은 커플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남편인 듯한 사람이 부인을 달래는 소리도 들려왔다. 시끄러운 소리는 한참을 계속 되더니 어느덧 조용해졌다. 나는 나중에 새 이웃에게 인사나 하러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잠을 청했다. 오늘은 내일 만날 가족들 생각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찾아오기로 한 일요일 아침이 되기 전에 나는 잠에서 깨어버렸다. 가족들과의 재회에 대한 기대감에 잠을 설친 것이 아니었다. 고요함 속에서 나의 귓가를 맴도는 울음소리가 나의 단잠을 방해하였다. 나는 잠에서 깨지 않으려 애쓰다가 결국에는 일어나 버렸다. 울음소리가 어찌나 애처롭던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 또한 이유 없이 슬퍼지려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울음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찾으려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울음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냈다. 그곳은 바로 503호였다. 나는 503호를 찾아갔다. 거기서 울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옆집인 502호에 사는 아저씨'라고 내 자신을 소개한 뒤 '왜 울고 있는지' 물어 보았다. 훌쩍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아이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이의 얼굴을 본 나는 그 아이가 내 딸과 비슷한 또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는 계속해서 울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라는 나의 질문에 그 아이는 울음을 멈추고 '부모님이 자신을 여기에 내버려두고 갔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울음소리는 작아졌지만 그 아이는 여전히 울먹거렸다. 나는 아이가 울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다른 궁금증이 생겼다. '그 아이의 부모가 자식을 버린 이유가 뭘까?'.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 어린 여자아이가 부모님을 자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함께 살지 못하고 외할머니 손에 길러지고 있는 내 아이들이 생각나서 마음 한 구석이 저려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울고 있는 이웃집 여자아이를 달래어서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 아이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여자아이는 내 딸과 같은 나이의 초등학교 4학년이고, 이름은 김유라였다. 여자아이에게는 다른 형제가 없으며, 엄마 아빠는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는 사내 커플이다. 1달 전쯤에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던 길에 엄마 아빠의 직장 동료인 아저씨를 따라 갔다가 어느 건물의 방에 갇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경찰에 의해 얼마 전에 발견되어졌다. 엄마 아빠를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나 기뻤는데 엄마 아빠는 자신의 얘기는 들어주지 않고 말없이 울기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편안히 쉬어야 한다며 지금 자신이 울고 있는 여기, 503호로 보내졌으며 엄마 아빠는 자주 오겠다는 말을 하고 울다가 돌아갔다고 한다. 여자아이는 자신이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웃집 여자아이가 버림받은 것이 아니며 나처럼 되돌릴 수 없는 사정으로 가족과 떨어지게 된 것이라고 한 참을 달래어 주었다. 그리고 내 가족들도 자주는 아니지만 나를 보러 찾아오며 내일이 그날이라고 말해주었다. 내일 찾아올 내 딸이 그 아이와 같은 또래이니 소개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나는 잠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3.


내가 다시 잠을 깬 때는 일요일 점심 때 쯤이었다. 나는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 라는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잠을 깨었다. 이웃집 여자아이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내 눈앞에는 나의 사랑스러운 아내와 내 아이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 낯선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그 아이는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거렸고 연신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해대었다. 아내는 그 아이의 어깨를 몇 차례 토닥거린 후 나에게 그 아이를 소개시켜주었다. 여자아이는 내 딸과 같은 반 친구이며 신장병을 앓다가 얼마 전에 신장을 기증 받아 건강을 되찾아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신장이 나에게 기증 받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내가 2년 전쯤에 신장을 기증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신장을 기증해 준 사람은 분명히 20대 남자였다. 그 사람이 여러 번 나를 찾아와 감사 인사를 했기 때문에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 달 만에 만난 가족들을 보니 신장 기증의 문제 따위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다면 신장을 양쪽 다 떼어주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이번에는 백합꽃 대신에 프리지어 꽃을 가져왔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그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프리지어 꽃은 바로 내가 아내에게 프러포즈할 때 주었던 꽃이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봄 소풍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가족과 함께 즐겁게 보낸 일요일 오후는 어느덧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가야만 할 시간이 되었다. 아내는 또 다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또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며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여보! 잘 지내죠? 나와 당신 아이들은 당신이 우리 곁을 떠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살아 숨쉬는 걸요. 그리고 당신의 장기를 기증해 준 모든 사람들의 몸속에서도,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서도 당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요. 나는 당신이 뇌사 판정을 받은 이후에 많이 고민했어요. 하지만 우리 딸 민지의 친구가 신장병에 고통 받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결심했어요. 당신의 신장을 받은 이 아이를 보면 언제나 당신이 생각난답니다. 그리고 당신이 언제나 우리 아이들 곁에서 아이들을 보살펴 줬으면 해요. 초등학생이 납치되었다가 1달 만에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해요. 하지만 당신이 우리 아이들을 지켜주니 난 걱정이 없어요. 여보! 너무 보고 싶어요. 그리고 사랑…….흑흑……."


아내는 마지막 말을 마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어느새 어른 같이 느껴지는 우리 아이들과 내 딸의 친구에게 부축을 받으며 내가 살고 있는 OO납골당을 나갔다. 나는 내 아이들뿐만 아니라 내 이웃집 여자아이도 잘 돌봐줘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프리지어 꽃내음을 두 손 가득 담아 이웃집, 503호로 향했다.



*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유명을 달리한 고인(故人)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 2003년 12월 19일 조약돌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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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사람 13,100명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신장, 골수, 간장을 이식 받은 사람 1,695명

뇌사자 86명으로부터 장기 이식을 받은 사람 363명.


“휴우.”


지나간 통계 자료를 보던 나는 한숨을 크게 지었다. 뇌사자 86명이 363명에게 새 생명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내 몸의 전율이었다.


내 나이 올해로 스물아홉, 내년이면 나도 가수 김광석이 그의 노래 ‘서른 즈음에’에서 말하던 것처럼 하루하루가 새롭게 느껴질 나이다. 나는 올해로 입사 2년차가 된 평범한 직장인이다. 남들은 내 나이쯤 되면 미래의 배우자를 고르기 위해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빠른 승진을 위한 노력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물론 나에게도 사귄지 3년이 지난 여자 친구가 있기는 하지만 일을 핑계로 그녀에 대해 소홀히 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작년 가을이었는지 겨울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함께 영화를 봤었던 적이 있었다. 인간이 죽을 때 몸의 무게가 21그램이 줄어드는데 그것이 인간이 가진 영혼의 무게라는 것이 영화의 핵심 내용이었다. 미신이나 신, 종교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나에게 그런 영화의 내용은 억지스러운 내용일 뿐이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후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사람이 죽으면 죽은 자의 영혼이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느냐고. 나는 웃으며 그녀의 질문을 회피했었다. 지금이라면 그 대답을 해 줄 수 있을 텐데…….


쌓여가는 업무 때문에 야근이 이어졌고 나는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오늘이 며칠인지 모를 정도로 시간은 빨리 흘러갔다. 그러다 오랜만에 어느 토요일 저녁의 달콤한 휴식이 찾아왔다. 침대에 누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그동안 지친 몸을 쉬게 하고 있었다. 잠을 청하지 않았는데 깜빡 잠이 들었을 때의 나른한 기분을 나는 좋아한다. 그런 기분을 느끼며 잠이 들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시계를 확인하니 자정이 지나 일요일이 되어 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그녀였다. 토요일 밤에 하는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눈을 떠요>라는 코너가 있는데 각막 기증 운동을 벌이고 있고, 그녀도 감동을 받아 각막을 기증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함께 각막 기증을 할 것을 권유했다. 담에 하지 뭐. 간단히 대답을 한 후 나는 전화를 끊었다. 약간은 삐친 듯한 그녀의 반응에 마음이 쓰였지만 나에게는 달콤한 잠에 대한 욕구가 더 컸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그녀와 내가 만나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나에게 그녀보다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녀와 이별을 경험했다. 그녀가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의 무심함이 이별의 가장 큰 이유였던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별에 담담했던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더 집중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 노력을 하늘도 알아 준 것일까.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나는 과장으로 승진을 하게 되었다. 회사 창업 이래 가장 파격적인 인사라는 소문이 회사 내에서 나돌았지만 그 뒤에 나의 숨은 노력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이제 어느 정도 목표를 이루었다고 생각한 나에게 여유로움이 손짓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아는 분의 소개로 새로운 여자를 알게 되었고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시간은 또 흘러가 나도 어느 덧 삼십대 중반이 되어 가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힘이 나는 딸아이가 나에게도 생겼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고 있었다. 그러던 내 일생에 커다란 폭풍우가 몰아 친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 나는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부장으로 승진하였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회사 선후배, 동료들과 술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술집을 여러 번 옮겨 다닌 후 술이 어느 정도 얼큰하게 올라오자 우리는 노래방으로 향했다. 나는 여직원의 노래를 듣다가 집에서 나를 기다릴 아내가 생각나서 전화를 하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왔다. 찬 바람을 쐬며 휴대 전화를 꺼내 집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는데 한 행인이 다가왔다.


“김상현 부장님.”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내가 오늘 부장으로 승진한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신호음이 들리는 휴대 전화를 손에 든 채로 그를 살펴보았다. 남루한 옷차림의 그는 거리의 부랑자쯤으로 생각되었다.


“누구시죠?”


“김상현 부장님, 오늘은 2011년 4월 9일입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날짜 관념 없이 일과 직장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나에게는 정말 새로운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일 모레가 아내의 생일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뒤늦지 않게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행인에게 알 수 없는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고마운 마음은 행인이 보여 준 종이 한 장을 본 후에 증오와 저주로 바뀌었다.


“김상현 부장님, 이제 기억나시나요? 계약 기간이 만료 되었습니다.”


나는 20년 전의 그 일이 생각났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지리산으로 가게 된 수학여행이 모든 일의 발단이었다. 3박 4일간의 수학여행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고 학교로 돌아오던 차 안이었다. 지난 밤 밤새 놀며 선생님 몰래 숨겨온 맥주도 한 모금 마셨던 터라 나는 피곤함을 느끼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내가 탄 버스가 급커브 길에 미끄러져 저수지로 추락을 한 것이다. 다행히 뒤따라오던 차량 운전사의 신고로 신속히 구조는 되었지만 병원으로 옮겨진 나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같은 병원으로 옮겨진 반 친구 중의 몇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는 것을 귓가에 들려오는 통곡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이제 내 차례가 점점 가까워온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내 눈에는 믿기지 않는 것이 보였다. 내 단짝 친구의 영혼이 내가 누워 있는 침대 근처를 서성거리는 것이 아닌가. 돌아오는 버스의 가장 앞자리에 앉았던 그 친구의 몸은 버스가 저수지에 추락할 때 수압에 깨진 앞 유리 파편에 수없이 난도질당했던 것이다. 몸은 성한데 영혼의 생명이 다해가는 나와 영혼은 멀쩡하지만 돌아갈 몸이 없는 그 친구에게 다가온 사람이 바로 서른다섯의 나에게 계약서를 내밀고 있는 그였다. 영혼을 기증할 수 있다는 그의 설명을 들은 후 친구는 자신의 영혼을 나에게 기증하기로 했고 나도 동의했다. 물론 친구의 영혼의 남은 기간만큼, 그 기간이 바로 20년이었다.


그동안 꿈인 듯 여겼던 일이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자 나는 서서히 친구의 영혼이 내 몸을 떠나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니, 내 영혼이 20년간 정들었던 친구 상현이의 몸을 떠나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내일 신문 기사는 어느 30대 회사원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댈까.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그녀의 권유에 따라 각막 기증 등록이라도 해놓을 걸……. 내 손에 쥐어진 휴대 전화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오다 점점 희미해졌다.

- 2005년 5월 15일 조약돌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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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도 대답 없는

그대 이름 부르는 건

내 입에 밴 습관


 

걸어도 받지 않는

그대 번호 누르는 건

내 손가락에 밴 습관



여전히 변함없이

그대 사랑하는 건

내 심장에 밴 습관



내 몸에 습관이 밴 것처럼

그대도 내 몸에 배어있네요



유리 조각 그대 - 10점
조용래 지음, 조은혜 그림/한국문학세상
사랑, 이별, 그리움에 관한 시 63편과 각각의 시에 어울리는 63개의 일러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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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붓기 시작한

그대 명의 적금



내 사랑 고이 담아

매일 입금하는

그대 명의 적금



영원이라는 만기일까지

그대 위해 넣는

그대 명의 적금



"사랑 적금을 찾으려면

명의인이 오셔야 합니다."



신분증 대신, 내 눈앞에 그대가

도장 대신, 그대 지문을 내 손에

그렇게 해야만 찾을 수 있는

그대 명의 사랑 적금




유리 조각 그대 - 10점
조용래 지음, 조은혜 그림/한국문학세상
사랑, 이별, 그리움에 관한 시 63편과 각각의 시에 어울리는 63개의 일러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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